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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Aug 16. 2023

여름방학 일기: 잠깐 쉬어가도 괜찮아요

갭먼스(gap month)를 가지다

갭이어(gap year)를 언제 처음 들어 봤더라? 2013년 스웨덴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일 거다. 많은 유럽 애들이 대학교 입학 전 1년을 여행하며 보내거나 자신의 미래를 찾으며 시간을 보낸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엄청 부러웠다. 수능을 치르자마자 수시 논술 시험을 위해 매주 주말마다 대구에서 올라와 엄마 지인 분들 집을 전전하며 그 해 겨울을 보냈다. 그렇게 대학교에 입학하고서도 쉴 틈 없이 학기와 아르바이트를 함께 해치웠다.


딱 1년을 나도 쉬긴 쉬었는데 그건 오로지 교환학생을 가기 위함이었다. 교환학생을 가기 위해 비행기표부터 시작해서 여행비며 여분의 생활비며 온갖 비용을 벌어야 했는데, 교환학생 합격을 위해 영어 시험을 준비하는 것도 벅찬데 거기다 학교까지 다니려니 아주 죽을 것 같았다. 게중 몇 개는 포기해야 했는데 당연히 내 선택은 학기를 포기하는 거였다. 그래서 1년 중 한 학기는 돈을 아주 열심히 벌면서 영어 학원을 다녔고, 교환학생에 합격한 나머지 학기엔 아예 풀타임으로 죽어라 돈만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을 차곡차곡 모아 떠나온 스웨덴에서 처음 갭이어를 듣게 됐다.


그리고 또 갭이어를 언제 들었냐면, 몇 년 전 멀리 알고 지내던 한 지인 분의 콘텐츠에서였다. 그분은 이른바 ‘갭이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을 인터뷰한 콘텐츠를 제작했는데, 하나하나 꼼꼼하게 읽어보진 않았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갭이어를 보내고 있었다. 부부가 함께 갭이어를 보내고 있다는 글도 봤는데 꽤 신선했다. 그래도 여전히 나랑은 먼 이야기지. 프리랜서거나 마음과 지갑에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지 않을까 하며. 무엇보다, 갭이어를 가진다고 해서 딱히 삶이 나아질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 1년 동안 불안하기만 할 거 같은데, 하면서.


그런 내가 얼마 전 갭먼스를 가졌다. 마음 같아선 갭이어를 가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회사 유급 병가가 90일이었으므로. 또 내가 속한 팀이 아주 소규모 팀이다 보니 한 명의 빈자리가 동료들에게 매우 크게 부담될 것이 빤했으므로. 양심상 휴직은 일수로 한 달. 내 휴가와 연휴 등등을 모두 합쳐 대략 한 달 반 정도를 쉬었다. 왠지 갭먼스를 가졌다고 하니 내가 언제부터 일을 시작했으며 한 번도 이직을 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쉴 틈이 없었으며 어쩌구 저쩌구를 길게 늘어놓고 싶지만 사실 이번 갭먼스는 나의 쉴 틈 없음과는 별개였다. 오로지 아팠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몸이 삐그덕 거리던 애인은 퇴사를 갈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대책 없음이 신기하지만 어쨌든 그는 회사를 결국 때려치웠고 나는 휴직계를 회사에 조심스레 내밀었다. 둘이 이렇게 함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놀았던 적이 언제였나. 거의 7년 전이다. 처음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날이 어색해 어벙벙하던 우리도 이내 곧 여름방학을 맞이해 굉장히 신난 초등학생처럼 변해갔다. 나는 10년 된 친구들과 친구됨 1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발리로 여행을 떠났다. 돌아와서는 큰맘 먹고 바꾼 올드카를 타고 애인과 속초로 내달렸다. 그러고서 2주 동안 함께 순례길을 걸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한강 수영장을 가고 낮에 한가롭게 카페에 가 책을 읽기도 했다. 어떤 날은 하루 종일 영화를 봤고 대부분의 날은 직접 요리를 해 끼니를 건강하게 챙겼다. 얼마 전 집 근처에 생긴, 내부에 아주 멋들어진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 멋진 바를,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가지 못한 그 바를 대낮에 가 마티니 한 잔을 시켜 마셨다. 또 어떤 날은 글을 썼고 또 어떤 날은 한참 보지 못한 친구네에 놀러 갔고 또 어떤 날은 잠만 잤다. 어떤 날은 상상도 못 할 아침 요가를 듣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즉흥적으로 위스키를 사 하이볼을 해 먹었다. 우린 길지만 짧은 여름을 붙잡고 있었다.


갭이어가 간절해진다. 갭먼스가 이렇게 좋은데! 갭이어는 얼마나 좋겠어!


사실 갭이어를 보며 내가 비죽이던 것처럼 나 스스로나 일상이 아주 드라마틱하게 변했냐? 하면 모르겠다. 그러나. 작지만 아주 무수한 변화가 있었다. 우선 마음이 여유로워졌다. 나는 명절 때도 고향에 가지 않는 천하의 불효걸인데 이번엔 큰맘 먹고 무려 5일이나 고향에 내려갔다. 부모님이 아주 좋아하셨다. 무슨 일이 있어도 토요일 늦게, 늦어도 일요일 오전엔 올라와 주말을 마무리하며 월요일을 맞는 준비를 해야 하는 직장인 자아가 사라지니 이렇게 편하다. 관심도 없던 과학책을 읽기 시작했다. 양자역학.. 아직도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 과학책을 읽는다. 반절 정도 읽다 어디엔가 처박아두고 결국 읽지 못한 책들도 끝냈다. 자꾸만 나로 파고드는 거 말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래 원래 나 남한테 관심 많았었는데. 그런 렌즈를 끼고 보는 평일 대낮 길거리 풍경은 늘 풍요롭다.


소름 끼치게 빠른 한 달 반이었지만, 대신 하루하루 밀도가 높았다. 깨어 있는 시간의 2/3를 일하기 위해 보내고 남은 여분의 시간을 오로지 주말만 바라보며 허망하게 보내던 나날들과 달랐다. 또는 어떻게든 의미 있게 보내려 강박에 쫓기며 꾸역꾸역 할 일을 채우던 나날들과도 달랐다. 앞으로 언젠간 또 있을 한 달, 아니 1년을 간절히 바라지만, 동시에 평범한 이 하루하루도 지나간 한 달처럼 풍요롭게 보내겠노라 다짐한다. 그것이 갭먼스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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