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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Oct 15. 2023

순옥

일하는 여성

순옥은 얼마 전 정년 퇴직했다. 거의 평생을 일만 하고 살았기에, 더구나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아이들과 하루 종일 함께 있는 돌봄 노동을 했기에 퇴직하고 나면 홀가분할 줄 알았다. 그런데 순옥은 우울하다고 했다. 퇴직일이 다가오자 왠지 쓸쓸하고 슬프댔다. 퇴직 다음 날 내가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을 때도 놀게 되어 기쁜 기색은 하나도 없이 정말로 슬퍼했다.


순옥은 대학 졸업 후 장애 아동들이 다니는 특수 학교의 교사로 일했다. 그리고 한 남자를 선으로 만나 결혼했고 곧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얼마 뒤 혜지 엄마로 불렸다. 조금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둘째가 태어났고 이내 성윤이 엄마로 불리었다. 그렇게 두 아이 엄마로 가사 노동과 육아 모두를 함께 책임지던 와중 IMF가 터졌고 그 이후는 모두가 짐작할 법한 서사다.


꽤 오랜 시간 경력 단절이 생긴 순옥은 교차로 같은 그 시절 일감이 담긴 신문을 차곡차곡 모아 와 볼펜으로 줄을 쳐가며 일자리 면접을 보러 다녔다. 하루는 내게 ‘엄마 결국 안 됐어..’라며 우는 듯 웃는 듯하는 표정으로 소식을 전했는데, 그 순간만 생각하면 평소와 다르게 립스틱을 빼곡하게 칠한 어색한 순옥의 입술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인터넷 부업부터 부동산 중개사 보조를 거치고 순옥은 결국 집에서 조금 떨어진 장애 특수 학교의 보조 교사로 재취업하게 된다. 얼마나 기뻤을까. 순옥은 그 직업이 잘 맞는 듯했다. 생활 지도까지 겸해 아이들이 머무는 기숙사에서도 근무를 했어야 했는데 가끔 전화로 학교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순옥은 아이들보다 가끔 생기는 어른들과의 사소한 마찰을 더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퇴직을 하고 나면 해방감을 느낄 거라고 나는 으레 짐작했다. 꼭 이 일이여서가 아니라 너무 긴 시간 동안 일을 해냈으니까. 게다가 가사 노동과 육아마저 모두 홀로 해냈으니까. 그럼에도 순옥은 우울해했다. 순옥의 우울감만큼 비례해 내 걱정 역시 늘어났고 그래서 요즘 자주 전화를 걸어 긴 빈 시간 동안 무얼 하는지, 운동은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재차 물었다.


얼마 전 대구에 내려갔더니 순옥의 표정이 밝아 보인다. 나의 조언에 따라 힘겹게 시작한 걷기 운동이 이제는 매일 최소 3-4km를 걸을 만큼 꾸준히 해내고 있으며 얼마 전엔 7km를 걸었다며 뿌듯한 표정으로 사진으로 남긴 기록을 내게 보여줬다. 그러다 사진을 옆으로 넘겨 한 아이를 보여준다. 실은 학교 아이들 중 한 명이 같은 동네에 사는데 너무 귀엽고 예쁘고 나를 잘 따랐는데, 퇴직 이후 그 아이가 계속 마음에 걸리고 보고 싶더라. 아이 가정 형편상 사실상 돌봄이 부재하고 주변의 도움도 받을 수 없어 유일한 부양자 역시 아이를 보기 위해서 일을 나가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생긴다고. 그래서 지난 주말 아이를 잠깐 봐주었다고.


순옥은 부양자에게 교사로서 알고 있는 사실, 그러니까 장애 아동 돌봄 지원 바우처라는 게 있고 그걸 사용하면 부양자가 그 시간 동안 일을 할 수 있으며 특히 한부모 가정의 경우 그 시간이 더 길게 나오니 알아보라는 이야기를 했단다. 그 길로 부양자는 그 바우처를 신청했고 지원이 시작됐는데 문제는 지원 선생님들이 많지 않아 그나마 가까이 있는 선생님으로 등록했음에도 아이를 맡기기 위해 차로 편도 40분의 거리를 가야 한단다. 부양자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순옥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내가 그 일을 하면? 안 그래도 눈에 밟히는 아이, 마침 집 근처에 사는 아이인데 내가 그 자격증을 따고 경력을 살려 아이를 지근거리에서 보면 좋지 않을까.


얼마 전만 해도 우울해하던 순옥은 밝은 표정으로 다음 달부터 교육을 듣는다고, 그런데 하루에 8시간을 들어야 하는데 도망도 못 가고 보강도 없어서 무조건 그 수업을 다 들어야 한단다 걱정하는 척, 그러나 한껏 상기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잘됐다고, 응원한다고 전했다.


주변에 롤 모델이나 참고로 삼을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여성 어른들이 없다고 버릇처럼 타령해 왔지만 실은 가장 가까이에 순옥과 그 동생 미옥이 있다. 고졸인 미옥은 쉰 살이 넘어서 대학을 다니며 산업 기사 자격증을 몇 개나 땄다. 순옥은 끊임없이 일하는 여성이었고 일을 좋아했다. 순옥의 퇴직 때 나의 진심을 적은 카드를 전했다. 계속해서 일하는 순옥이 있었기에 나도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왔다고. 그 덕에 나 역시 일을 좋아하고 계속해서 일하는 나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라고. 순옥은 꽤 오랜 시간 동안 나의 카드를 카카오톡 프로필 화면에 올려 두었다. 요즘 삶의 태도에서 가장 큰 용기와 영감을 주는 건 이 두 여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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