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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ㅎㅈ Nov 17. 2023

First Love 하츠코이

첫사랑을 찾아서

우타다 히카루 - First Love

어제부터 무한 반복 중이다. 이 글도 노래를 들으며 쓰고 있다. 올해 초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일본 드라마 First Love를 어제 끝냈는데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실은 올해 초 공개되자마자 바로 봤는데 3화 정도에 살짝 지루해 하차를 했었다. 그러다 날이 추워지면서 다시 생각나 재생했다가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끝내 버렸다.


한참 성장할 시기에 일드나 jpop과는 거리가 있었던지라 퍼스트 러브를 보고 처음 이 노래를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엄청 유명한 노래더라. 무려 일본에서 제일 많이 팔린 음반이란다. 그렇게 유명한 노래를 한참 감수성 충만하던 시절에 알지 못해 억울하다. 왜 서른이 넘어서야 알게 됐지?


하지만 그렇게 억울할 것도 없다. 왜냐면 이 노래를 듣자마자 강하게 기억 조작이 됐다. 마치 눈 내리는 도쿄 또는 삿포로 어디선가 첫사랑을 한 것만 같은 기억 조작이 일어났으니까. 그렇게 힘이 센 노래는 잘 없는데 간만에 엄청난 노래를 들은 것이다. 그러니 일본에서 역대 제일 많이 팔렸겠지. 멜로디부터 기억 조작인데 가사를 보고선 기절할 뻔했다. 마지막 키스는 담배 향이 났다니. 청춘멜로 한 편 뚝딱. 언젠가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도 당신이 알려준 사랑을 기억하겠어요... You are always gonna be the one..


나만 기절할 뻔한 게 아니었는지 무려 이 노래에 영감을 받아 창작된 드라마가 나왔다. 그게 바로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다. 하츠코이는 일본어로 첫사랑이다. 이 드라마는 우카다 히카루의 퍼스트 러브를 아주 착실히, 그리고 똑똑하게 재현해 냈다. 실은 문장으로 쓰자면 클리셰 범벅이다. 고등학생, 첫사랑, 첫눈, 어른이 되고, 멀어지고, 헤어지고, 기억 상실증(!), 어른이 돼 다시 우연히 만남, 기막힌 운명 etc etc. 그러나 이 모든 클리셰를 뛰어난 구성과 연출로 더 맛있게 만들어 낸다. 반짝반짝 빛을 내며 하츠코이를 하던 어린 시절과 어쩐지 색이 다 빠져 버린, 지칠 대로 지쳐 버려 그저 관성에 기대 가만히 서 있는 40대 언저리 어른들의 모습을 교차 편집하며 보여주는데, 꼭 둘의 사랑 이야기뿐 아니라 각각 개인이 어떻게 살아왔고 성장해 왔는지, 또는 멈춰 버렸는지를 잘 보여준다.


더 재밌는 지점은 처음부터 샅샅이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른바 떡밥을 엄청나게 뿌려 놓는데 그게 하나하나 어린 시절과 어른 시절 곳곳에서 잘 회수되어 발견할 때마다 마치 보물 찾기에서 보물을 뽑은 마음 같다. 책갈피, 모의고사, 비행기, 승무원, 파일럿, 눈, 첫키스, 담배, 담배 속 편지. 아놔 다시 생각해도 눈물이 흐르네. 게다가 각 에피소드 별로 붙은 제목도 일품이다. 수어로 말해요 (수어도 눈물 줄줄임), 육감, 어떤 오후의 프루스트 효과. 크 특히나 에피소드 8화의 엔딩은 최고의 엔딩이었다. 사실 난 드라마가 여기서 끝난 줄 알았다. 여기서 끝나도 더 멋졌을 텐데 그래도 9화의 하루미치의 편지 때문에 더 마음이 아련해졌으므로 인정이다.


물론 이 클리셰 범벅의 드라마가 기가 막히게 나온 이유는 구성과 연출 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일등공신은 바로 노래다. 우타다 히카루의 퍼스트 러브. 드라마는 이 노래로 시작해 이 노래로 절정을 치닫고 이 노래로 끝난다. 제이팝에 아무런 배경 지식도 없는, 일본에서 나고 자란 10대 청소년의 인생과 전혀 연관도 없는 내가 처음 이 노랠 듣자마자 내가 홋카이도 고등학교의 여주라니 급으로 기억 조작이 됐다니 말 다했다. 그저 이 노래가 모든 걸 살렸다.


8화 마지막 엔딩부터 눈물이 줄줄 흘렀다. 9화는 보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드라마를 끝내고 나니 마치 첫사랑을 막 방금 앓고 끝낸 사람처럼 가슴이 아렸다. 너무 대단한 드라마 아냐? 사실 이번 글의 주제는 이게 아니었는데.. 이걸로 시작해 내 첫사랑을 이야기하는 글이었는데 드라마 찬양하다 서론이 본론이 됐다. 사실 난 첫사랑이 누군지 아직도 정의 내리지 못했다. 중학교 때 걔? 글쎄, 누군가를 좋아하는 내가 좋았던 거 같다. 고등학교 때 오빠? 첫은 맞는데 사랑인지는 잘 모르겠다. 약하다. 20대 초반 때 걔? 첫도 아니고 사랑인지도 확신이 없다. 온갖 미디어에서 말하는 애달픈 그런 첫사랑을 겪지 않아 그런가. 그래서 한때는 친구들과 술만 먹으면 첫사랑이 누군지 물었다.


대부분은 그랬다. 사랑.. 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쨌거나 가장 풋풋한 시절, 가장 설렜던 사람을 첫사랑으로 꼽는 듯했다. 아 그래도 어렵다. 대충 둘로 추려지긴 한데. 둘 중 누구에게 영광의 첫사랑 자리를 내주어야 하나. 이 드라마를 보면, 이 노래를 들으면 그게 좀 잡힐까 싶었는데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들의 사랑을 보고 있자면 지나간 내 모든 사랑이 볼품없이 느껴진다. 그래도 이걸 끝냈을 무렵엔 내 첫사랑을 정하고 싶었는데. 다시 억울해진다. 난 왜 첫사랑이 없는가. 당신들의 첫사랑은 누구인가. 무슨 기준으로 정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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