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분 묻기 프로젝트
요즘 매일 애인과 동료들에게 하루에 한 번, 기분이 어떻냐고 묻는다. 묻게 된 계기는 사소하다.
어릴 땐 대체로 기분이 나쁜 일들이 선명했다. 누가 그래서 기분이 나빴어, 내가 이래서 기분이 나빠. 다시 말하면 보통은 기분이 뉴트럴이거나 좋은 편이기에 기분 나쁠 일이 비교적 또렷하게 남았다.
반대로 요즘은 행복한 순간을 찾고, 기록한다. 이럴 때 기분이 좋아, 지금 이래서 행복해. 기분이 나쁠 일은 좀처럼 없다. 운이 좋은 걸까, 또는 대체로 기분이 좋지 않은 게 기본값이라 그런 걸까? 곰곰 생각해 보니 기분의 평균이 좋지 않음이라 그런 것 같다. 나만 그런가 문득 궁금해졌다.
게다가 기분을 표현하는 어휘도 매우 빈곤함을 느낀다. 김영하 작가는 ‘대화의 희열’에서 아이들에게 ‘짜증 난다’는 표현을 금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짜증 난다’는 말은 너무 많은 감정을 표현한다. ‘서운하다’, ‘억울하다’, ‘속상하다’와 같은 수많은 감정들을 ‘짜증 난다’라는 모호한 말로 치부해 버린다. 이와 같은 표현은 우리의 감정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걸 방해한다”.
내 기분을 탐구하면서, 비슷한 결로 나 역시 내 기분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고 느꼈다. 기분이 좋다, 나쁘다, 별로다, 그냥 그렇다. 기껏해야 행복하다, 충만하다, 기대된다, 서운하다 정도? 남들도 이런가 궁금해졌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매일 기분을 묻기로 결심했다. 그즈음 주변엔 유난히 힘들어 보이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 맛있는 밥을 함께 먹고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는 회복이 어려워 보였다. 그럴 때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궁금했다. 내 질문으로 자기 기분이 어떤지 표현하는 과정, 자신의 기분을 돌아보는 과정으로 어쩌면 기분에 새로운 변곡점을 찍을 수 있진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그래서 매일 기분을 물었다. 처음엔 사람들도 비슷한 답을 했다. 안 좋아요, 그저 그래요, 그냥 그래요, 나쁘진 않아요. 기분을 묻는 이유를 말해 주었다. 그리고 다음날 또 물었다. 사람들의 답변도 점점 변했다. 구체적으로 기분을 표현했고 기분이 왜 그런지도 말해줬다. 어떤 사람은 내게 먼저 기분을 묻기도 했다.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기분의 기본값이 그저 그럼이거나 나쁜 편이었다. 한 동료는 “인간이라면 보통 기분이 나쁜 게 정상”이라는 인상 깊은 답변을 내놓았다. 사실 내 기분 질문의 시작이 된 문제의식이기도 했으나 막상 타인에게 노골적인 답변을 들으니, 왜인지 여생을 이런 값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삶의 태도가 많은 걸작과 사상을 낳기도 했으나 그건 일단 모른 척)
공교롭게도 얼마 전 업무차 쓴 인터뷰 글에서도 기분 이야기가 있었다. 인터뷰이는 꽤 괜찮은 하루를 보내기 위해, 자신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들을 아는 게 중요하다고 답했다. 몇 가지를 알아 두고 기분이 나쁠 때마다 이용한다고. 기분을 좋게 하는 것, 나쁘게 하는 것을 알기 위해 시간을 투자한다고도 답했다. 이 답변이 꽤 흥미로웠다.
내 기분을 좋게 하는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주로 즉각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떠올려 보았다. '낮에 집 앞 한강에 가 차가운 화이트 와인을 마시기', '내가 좋아하는 삼청동과 종로 인근 길을 몇 시간씩 정처 없이 걷기', '동네 카페에 가 맛있는 커피 마시며 책 읽기', '애인을 깔아뭉개며 꼭 안기기', '좋아하는 노래 들으며 한강에서 자전거 타기'….
인터뷰이 말마따나 매일 매 순간을 행복하게 보내긴 쉽지 않을 거다. 대신 적어도 내 기분을 잘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되어야지. 기분을 좀 더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표현해야지. 그리고 주변의 기분도 묻는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 과정 속에서 매일을 꽤 괜찮은 하루로 보낼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