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나는 계획을 버리는 것을 배웠다
2020년은 그 누구에게 물어보아도 쉽지 않았다. 힘들었고, 답답했고, 심심했고, 외로웠고, 때론 상실감이 들었고, 무기력했다. 누군가를 생업을 접는 사람도 있었고, 끝까지 희망을 붙잡으며 미래의 나에게 맡겨야만 하는 사람도 있었다.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는 순간들이었고 그렇게 1년이 지나갔다.
연초에 세웠던 계획은 보란듯이 사라졌다. 올해 말엔 여름휴가를 아껴 3주동안 다시 가보고 싶었던 아르헨티나로 떠날 작정이었다. 다른 동료들이 조금씩 짬을 내 어딘가로 떠날 때에도 연말을 생각하며 버텨왔지만, 이제 몇 년 후에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다. 작년부터 연락을 다시 활발히 하기 시작해 만나기만하면 술을 궤짝으로 마셔서 이틀은 비우고 술을 마시게 된 대학교 친구들과는 여러번 강원도로, 부산으로 어디든 술마시면 바로 누울 수 있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려고 했었다. 이젠 하나 둘 차가 있고, 스스로 벌고 쓰다보니 얻은 여유를 맘껏 누려볼 작정이었다. 새벽에 별을 보러 운전을 해서 언덕을 오르고, 한우를 사먹고, 뷰가 좋은 숙소에서 각자 자자고도 했다. 이 모든 계획은 모두 '코로나가 잠잠해지면'하기로 했다.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어느해보다 즐겁고 재미있었을 날들이 아니었겠냐고. 하루라도 젊은 서른 하나를 이렇게 보내는 것이 맞느냐고, 어쩌면 좋아하는 사람과 에피소드를 만들고 연애로 갈 수 있지 않았겠냐고 이 놈의 코로나 때문에 기회를 날릴 때마다 방 안에 누워 하이킥을 천번도 더 날렸다. 이내 생사를 넘나드는 사람들과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확진자 수를 보며 방정맞은 발길질은 거두었지만 마음 속 깊은 곳의 아쉬움은 여전하다.
계획을 버리고 지금 해버리기
이것만이 유일한 해답이었다. 누군가 계획이 틀어지는 것에 양해 문자를 보내는 나에게, '2020년은 세운 계획을 얼마나 달성했느냐가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에 얼마나 감사하느냐를 보는 해'라는 글귀를 보내준 적이 있었다. 힘이 탁 풀렸다. 스스로 코로나로 체념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은 역시 머리로만 알고 있는 것이었고, 몸은 힘을 잔뜩 주고 순간순간 더듬이를 세우고 온갖 포즈로 대응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선 변화의 파도를 탈 수 없다.
나는 선생님입니다. 책 출판
공간공감포럼. 개정판 검수 및 E-book 출판
미래학교 컨퍼런스 3. 피어러닝 기획 및 운영
온더레코드 뉴스레터 100회
온라인 프로그램 & 커뮤니티 세팅
...
상반기엔 파도를 온몸으로 맞으며 버텼다. 지난해부터 밀려온 일감들을 다 쳐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6개월이 지나있었다. 지난해의 인터뷰와 컨퍼런스를 모은 원고작업을 3월까지 끝내고 몇차례 편집을 거쳐 6월에 한 권의 책<나는 선생님입니다>가 되었다. 이야기를 함께 만든 선생님들을 떠올리며 어느 한 번도 무거움이 가시지 않았던 작업이었다. 최종 원고를 보낸 후 5월엔 <공간공감포럼>의 개정판과 E-Book을 준비했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기분이 이랬을까. 책을 좋아하지만 만들어보진 않았던 내게 만들고 유통해보는 것 까지 하나같이 낯설고, 그래서 어려운 순간들이 지났다. 책은 나온 뒤엔 다른 국면을 맞는다. 누군가는 스스로 생명력을 가지고 움직인다는데,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내가 일하는 공간에서도 북토크로, 전시로, 세미나로, 큐레이션으로 책이 여러그릇에 담겨왔으니까. 덕분에 강연을 할 수 있는 기회들을 얻게 되었고 비대면이나마 저자로 선생님들과 함께 온라인 무대에 설 수 있었다. 기획자로서의 이야기는 한 장이 된 기획안 뒤의 내 판단의 순간을 되짚는 일이라 늘 쉽지 않았지만 즐거운 작업이었다. 연말 컨퍼런스에 와서야 준비된 것을 읊기보다 나의 생각과 판단을 믿자고 생각하기도 했으니까. 나를 믿기로 한 후론 컨퍼런스의 순간들이 즐거웠다. 이때쯤 재택과 출근을 오가는 일상에도 익숙해졌다.
온라인 프로그램 운영
컨퍼런스위크 기획 및 운영, 연사 & 진행자
온더레코드 1.0/1.5/2.0
...
하반기가 되어서야 서핑보드 위에 겨우 섰다. 자주 넘어졌지만 때론 해안 까지 나아가보기도 했다. 무엇이 될지는 모르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걸 해보자고 시작했던 온라인 프로그램들을 매달 5개에서 10개씩 기획하고 오픈했다. 그 덕에 컨퍼런스 위크의 워크숍 세션을 가득 채운 동료들이 생겼고, 지금의 버전 1에서 1.5 - 2까지 기획해볼 수 있었다. 생각만했던 일이 현실이 되는데엔 계획보다 실제로 노를 젓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금 체감했다. 물론 방향을 알려 줄 선장부터, 노하우를 알려줄 동료 선원까지 팀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렇게 먼 바다를 회고할 수 없었겠지만.
사실 파도를 타는데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다. 올해 언니의 결혼을 앞두고 마음먹었던 다이어트를 시작한 6월부터 결혼식이 있었던 10월까지 10키로를 빼고, 매일 술을 마시던 삶을 조금은 건강히 돌려놓을 수 있었다. 채식부터, 취미 발굴단까지 우여곡절과 조금 더 버텨보려는 악다구니의 사연들이 있지만 그 무엇보다 내게 진하게 남은 한 줄은 이거다.
적금 붓고 다시 타는 삶
대학교 가기 전까지 부모님과 살며 좋은 음식 골고루 먹으며 쌓았던 적금 같은 건강이 무너지는데 다시 10년, 그리고 얻는 몸무게와 나쁜 습관들을 빼는데 다시 수 개월이 걸렸다. 오늘 하루 적금을 부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매일 고민한다. 다이어트를 시작했던 6월엔 이미 마이너스 통장의 삶을 살아온지 꽤 몇 년이 지났던 때였고 결정의 기준은 오늘의 즐거움에 있었다. 건강을 돌보기 시작할 무렵 채소를 먹어야 하니 채식이, 채식을 하니 관련된 책과 개념들이, 그런 것들을 지키는 사람들과의 대화가 이어졌다. 술을 마시던 시간을 보내기 위해 시작한 차가, 차를 마시며 하던 명상이, 명상끝의 기록으로 이어졌다. 시간이 다른 결로 채워지니 내일의 일도 가뿐했다. 아, 영감도 적금이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매일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내 온 관심을 주고 있지만 적금이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골라보려고한다.
그렇게 1년을 마무리하며, 계획을 버리고 지금 해버리기의 마인드로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마침 부모님의 가게가 헐빈해졌고, 주변의 가게들이 입소문을 타 꽤 사람들이 다녔다. 아르헨티나에도 못가서 연차가 차고넘치는 마당에 부산에서 놀면서 해보자 싶은 마음에 부모님을 설득했다. 프로젝트샵을 3주만 해보겠다고. 이왕 시작하는거 공간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재밌는 작당을 파트너인 친 언니와 종종해볼 요량으로 구구비둘기라는 이름을 짓고 30대 두 자매의 일과 삶에 필요한 99가지의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그 중에 첫 번째 에피소드를 다루겠노라 공간을 무작정 열었다. 집에 잔뜩 쌓여있던 내 그림들을 다 꺼내 분류하고 다시 모아보니, 죄다 술마시면서 그려서 그런지 잔, 병, 앞에 있는 친구 그림들이 많았다. 그래서 첫 번째 주제는 <술은 나를 너무 사랑해>다. 내년 1월 첫주까지 열어볼 요량이다. @gugu.bidulgi
가벼운 몸과 마음을 잃지 않기
숱한 노력에도 운동시설이 모두 문을 닫고 나니 다시 살이 찐다. (홈트는 나에게 매우 관대해진다.) 내년엔 가벼웠던, 춤이 잘 춰지던 그 몸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그리고 무엇이든 해볼 수 있다는 가벼운 마음을 가지고 손도 조금 더 가볍게 내밀어보려고 한다. 늘 생각보다 문제를 쉽게 해결되고, 그리 겁먹을 것도 없다는 걸, 나만 믿으면 된다는 걸 좀 더 자주 기억해보기로한다. 내년엔 돈도 몸도 마음도 사랑도 적금 그득하게 붓자.
thanks to 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