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 책임, 목적, 꿈, 열정 다 내려놓고 일단 나로서 존재하기
다 괜찮아진 줄 알았던 일상이었으나,
지난해 9월, 추석 여행.
가족과 함께 떠난 그 짧은 여행에서
모든 게 무너졌다.
돈, 부모님, 감정, 그리고 내 에고.
내 안에 쌓여 있던 오래된 불씨가 폭발했다.
아팠던 내 남동생의 아내,
다른 문화, 다른 언어로 인해 더 커진 오해,
내가 아닌 부모님을 대변해야 한다는 헛된 착각,
우리 집을 무시한다고 착각했던 나의 피해의식..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너무 쉽게 판단했고,
그 판단은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결국, 우리는 “이제 안 보자”는 말까지 나왔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관계를 끊는다’는 말이 오히려 해방처럼 느껴지던 순간.
하지만 그 이후가 진짜 시작이었다.
9월부터 3월까지.
그 시간을 나는 혼자 보냈다.
정확히는, 철저하게 혼자가 되기로 했다.
생각하며, 관계를 정리하며,
동시에 나를 해부하듯 들여다봤다.
‘왜 그 상황에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왜 이해받지 못한 느낌에 그토록 무너졌을까?’
‘그게 진짜 가족의 문제였을까, 아니면 내 문제였을까?’
이 질문들 끝에 서 있던 건
상처받기 두려워 방어하던 ‘나’,
사랑받고 싶으면서도 거리를 두던 ‘나’였다.
나는 내가 만든 잣대에 갇혀 있었다.
리더로서, 맏이로서, 자식으로서
늘 뭔가를 해내야만 의미 있다고 믿어왔다.
그 믿음이 결국 나를 고립시켰다는 걸
그 시간 속에서야 알게 됐다.
그리고 4월.
동생에게서 집들이 초대가 왔다.
몇 달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
나는 아무 조건 없이,
아무 기대 없이 그 자리에 갔다.
이해받으려 하지 않고,
판단하지도 않았다.
그저 앉아, 그들의 삶을 바라봤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말없이 내려놨다.
내가 맞고, 그들이 틀렸던 게 아니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던 거였다.
나에게 먼저 사과해 주길 바라던 남동생,
처음엔 화가 났지만,
이내 남동생이 잘 컸구나 생각되었다.
독립해 지금은 와이프와 새로운 가정을 꾸렸고,
한 여자의 남편이자 가장이 된 남동생이
마땅히 해야 하는 행동이라 받아들였다.
그리고 우리 가족은 모두 모여,
사과했다. 그리고 화해했다.
그날 이후, 신기하게도 내 삶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정말 오랜만에 누군가와 연애를 시작했다.
내가 괜찮아지자
사람이 보였고,
사랑이 들어왔다.
5월.
동생이 결혼식을 올렸다.
나는 누구보다 기쁜 마음으로 축하하고 도왔다.
양가 부모님, 아름다웠던 가든웨딩,
생각보다 너무 많은 분들이 축하의 자리에 함께했던
행복 가득한 결혼식이었다.
하지만 결혼식이 끝나고
동생은 속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 비용이 너무 많이 나왔어…
부모님 손님들은 축의금도 거의 없고…”
예전 같았으면,
“그게 무슨 말이야?” 하고 화부터 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그의 슬픔이 내 슬픔처럼 느껴졌다.
비용이나 예의보다,
내 남동생이 실망하고 있다는 게 먼저 보였다.
경제적 차이에서 오는 부담감,
좌절감, 창피함, 실망감이 느껴졌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모습이리라..
그래서 잔소리 대신 같이 울었다.
"미안해, 누나가 먼저 갔더라면.."
“그랬구나, 힘들었겠다. 누나 축의금 안 했는데 축의금 할게.”
그동안과는 다른 행동을 했다.
그저, 동생의 슬픔에 동화되어 그랬구나 느꼈다. 함께.
근래에 또,
새로운 회사에서 오퍼가 왔다.
반가운 제안이기도 하다.
누가 들어도 아는 브랜드의 튼튼한 금융사를 배후에 둔,
하지만 나는 바로 결정하지 않는다.
그냥 ‘좋은 조건’보다
이 일을 통해 나는 누구로 살고 싶은지를
곰곰이 되짚어 본다.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도,
집에서 맏이로서도,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싶은가?
이 질문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은 나’를 마주했다.
능력보다 태도,
성과보다 진심,
강함보다 정직한 연약함.
나는 이제 내가 내 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럽다.
이 여정의 끝에서 나는 배운다.
사랑은 말이 아니라
상처를 품고도 다시 손을 내미는 용기에서 시작된다는 걸.
존재는 어떤 결과도 필요로 하지 않다는 걸.
그리고 삶은,
매 순간 충만하게 존재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는 걸.
이제 나는
불안에 이끌리지 않고,
사랑 앞에 닫히지 않으며,
어떤 역할도 나를 규정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나는 이제
‘나로 존재하는 것’에 초집중하며 살아간다.
앞으로 어떤 일이 펼쳐질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떤 모습이든
나는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나는
나 자신으로 사는 법을 배우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