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딘 시간들

2020. 02. 10. 첫 만남

by 윤혜린

“또 늦었어.” 자동차 시동을 걸고, 핸들을 움켜쥔다. 바쁜 마음으로 마을 회관 앞을 지날 때면, 보통 할머니 두세 분이 앉아 있다. 더 이상 나눌 이야기도 없는 듯, 먼 곳에 있던 시선이 내 차로 옮겨오고, 한동안 그 움직임을 쫓는다. “출근 하나 봐.”, “오늘은 늦었네.” 같은 이야기를 잠시 나눌 것이다. 오후 네다섯 시, 집으로 돌아올 때도 여전히 그 자리에 할머니 두세 분이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무심한 얼굴, 그곳의 시간은 멈춘 걸까.

첫째 예방 주사를 맞히기 위해 보건소에 간 날이었다. 할머니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겨울은 더 지겨워. 요즘 뭐하며 지내수?” “심심해서 그냥 길거리 나가 봐. 누가 지나가나, 저 사람은 뭐 하나 보는 거지, 뭐. 이젠 회관에서 화투 치는 것도 재미없어.” 두 할머니는 막 백일이 지난 딸아이를 보고, 오늘 참 좋은 날이라고, 어디서 이런 곰살맞은 걸 보냐며 소녀처럼 웃었다. 주사 맞는 아이의 울음소리, 은행으로 향하는 젊은이의 빠릿한 걸음, 트럭 가득 택배를 싣는 기사의 손놀림이 있어 다행인 하루. 누군가의 움직임을 보는 동안 그나마 시간이 흐른다.

문득 돌아가신 할머니 생각이 났다. 여든에 가까워지면서, 할머니는 하루가 길다고 한숨을 쉬었다. 아침이면 가족 모두 각자의 일터로 떠났다. 할머니는 그 뒷모습까지 아끼며 창가에 오래도록 서 있었다. 가끔 내가 집에 있는 날이면, 할머니는 내 뒤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책상에 있는 나에게 이런저런 넋두리를 늘어놓다 그마저도 바닥이 나면 누워서 눈을 감았다. “할머니, 나가서 편히 주무세요. 텔레비전이라도 보실래요?” 하지만 할머니는 오늘 네가 있어서 좋다고, 나는 이게 편하다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산책하는 것도 힘든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나를, 동생을, 엄마를,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첫째 돌 무렵 친정에서 일주일을 보냈다. 할머니는 아이가 “참 샛별같이 곱다.”며 눈을 반짝였다. 내가 아이의 기저귀를 갈고, 밥을 먹이고, 아이를 안아 재우고, 목욕을 시키는 모든 것을 할머니 자신의 일처럼 지켜보았다. “안서방은 엄마 집에서 밥 먹으면 되니까, 오래 있다 가라.”라며 입을 삐죽였다. 집에 갈 날이 가까워오면, 할머니는 내가 일어나기만 해도 “가나?”라며 화들짝 놀랐다. 그러다 내가 짐을 싸기 시작하면 아이처럼 눈물을 훔쳤다. 나와 아이가 사라진 할머니의 시간은 어떻게 흘렀을까.

2월부터 관인노인복지센터에서 ‘할머니 참 예뻐요.’라는 수업을 시작했다. 오래전부터 할머니, 할아버지와 그림책 수업을 하면 좋겠다 생각한 터였다. 함께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가위질을 하며 멈춘 듯한 시계가 움직이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첫날 수업을 마치고 사회 복지사가 큰소리로 말했다. “또 오세요. 다음엔 더 재밌어요.” 한 할머니가 답했다. “그럼, 와야지. 심심해서 와야 돼. 그래야 하루가 가.”


Photo by Andrik Langfield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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