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지 않다

3. 착한 남자와 산다는 것

by 윤혜린

한 시간이 지난 뒤 아이는 한결 부드러워진 얼굴로 대기실을 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살면서 수없이 만났지만 아이를 그렇게 존중하는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상담학을 공부했다고 해서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잘 모르는 사람이 들어도 진심이 담긴 위로와 책으로 배운 형식적인 대화를 구분할 수 있다. 태생적으로 타고난 걸까, 아니면 수없는 자기완성의 노력을 거친 걸까. 문득 나에게 이런 아빠가 있었다면 지금의 내가 어땠을지 궁금해졌다. 매일 내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나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고 있을 터였다.

-김혜연, <서툰 가족>, 123쪽


‘어, 우리 남편인데?’ 생각했다. 나의 배우자도 자신보다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다. 여러 마음에 귀 기울이고, 행여 상처받는 이가 있을까 주위를 살핀다. 남편은 기독교 집안에서 사랑받으며 자랐다. 시어머니는 아들 둘을 키우며 언성을 높이거나 매를 든 적이 없다고 했다. 남편이 다른 이들을 대하는 모습을 볼 때면 흐뭇하다. 그는 식당 아주머니, 청소부 아저씨에게 참 친절하다. 두 살 조카부터 여든 넘은 어르신까지 누구와도 어울린다. 그녀의 남편 또한 나의 남편처럼 바르고 착한 남자 같았다.


그러나 착한 남자와의 결혼은 달랐다. 남편은 은연중에 나에게도 ‘착함’을 요구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해주길 바랐던 것일까. 결혼 전까지 “난 쿨해.”라며 넘겼던 관계 문제를 자세히 들여다봐야 했다. 그가 좋은 사람이고, 옳은 것도 알겠는데, 난 헤맸다.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그처럼 살 수 없었다. 눈치 보며, 나는 점점 움츠러들었다. 여러 마음의 이면을 헤아리기에 내 그릇이 너무 작았다. 남편과 같은 모임에 다녀와서 내가 “난 B가 마음에 안 들어요.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지 모르겠어.”라고 하면, 남편은 “우리가 모르는 그 사람의 상황과 처지가 있을 거야. 네가 이해해봐.”라고 답했다.


“여보, 혜연아… 미안해, 정말 몰랐어. 당신이 그렇게까지 마음 아픈 줄. 난 그냥 당신도 나 같을 줄 알았어.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그렇구나, 내 인생에 아이를 주시지 않는구나 받아들이자. 당신이 그렇게까지 아이를 원한다고 생각하지 못했어. 난 그냥… 우리 둘이서도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 그리고 당신도 알잖아… 내가 장남으로 커온 거. 내가 좀 힘들고 불행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행복이 나에게는 더 중요했어. 나는 행복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었어. 당신이 내 아내이까, 당신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고… 정말 미안해. 당신 마음에 귀 기울이지 않고 이렇게 아프게 해서.”

- 앞의 책, 44쪽


행복까지 기꺼이 다른 이에게 양보하고 마는 남자와 살아가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아무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자, 그녀는 끝내 말을 잃었다. 그제야 그녀의 남편이 말했다. “그냥 당신도 나 같을 줄 알았어.” 타인의 언어에 민감할수록, 자기 안의 언어는 외롭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부끄러운 착한 남자, 그는 다른 이의 말을 듣는 것이 익숙해 정작 자신의 말은 듣지 못했다. 그것은 고스란히 그녀의 몫이 되었다. 나도 남편에게 가끔씩 눈물로 하소연을 했다.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당신 안의 목소리에도 귀 기울이라고 말이다.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며, 괜찮아 보이는 삶이 참 외로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영화는 어색하지 않게 그 부분을 더 잘 그렸다. 지영의 남편 대현은 퇴근하자마자 아이를 씻기려고 와이셔츠를 걷는다. 지영의 시댁, 친정 모두 괜찮은 편이고, 지영에게는 똑 부러지는 언니와 ‘츤데레’ 남동생이 있다. 도심의 한 아파트에서 딸 하나를 키우는 삶. 아주 풍족하지는 않지만, 크게 욕심부리지 않는다면 충분하다. 지영과 내가 너무 닮아서, 영화를 보다 끝내 울었다. 착한 남자와 살아도, 모든 것이 괜찮은 듯 잘 갖추어져 있어도, 혼자인 마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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