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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May 31. 2020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

1. 화성에서 온 남자


여자는 다행이라며 대뜸 학생 잘못이 아니에요, 했다. 세상에는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고, 자신도 많이 겪었다고, 이상한 그들이 문제지 학생은 잘못한 게 없다는 여자의 말을 듣는데 김지영 씨는 갑자기 눈물이 났다.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p. 69


  어둠이 깔린 길, 버스에서 모르는 남자와 같이 내린다. 나란히 걷다가 남자가 조금 뒤처진다.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한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엄마가 마중을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짧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꽉 메운다. 다행히 갈림길에서 남자가 반대 방향으로 꺾는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쉰다.


  늦은 시간 낯선 남자와 함께 걷는다는 것만으로 불안했다. 힘이 약한 여자라서, 다른 이유는 없다. 소설 속 김지영도 한 남자의 별 의미 없는 행동으로 가슴을 졸인다. 아마 남자들은 모를 것이다. 여자가 남자라는 존재 하나만으로 얼마나 큰 두려움을 느끼는지 말이다. 물론 좋은 남자가 더 많지만, TV 속 흉흉한 사건이 내 이야기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젊은 사람이 강된장을 먹을 줄 아네? 미스 김도 된장녀였어? 허허허허허.” (p. 114)


  아줌마개그는 없는데 아재개그는 있다. 왜 남자들은 아저씨가 되면, 아니 초등학생부터 아재개그를 좋아할까. 나는 아재개그를 사랑하는 아버지 덕분에 무려 30년 가까이 참 재미없고, 유행에도 뒤처지는 말장난을 들었다. 어렸을 때는 예의상 조금 웃었고, 커서는 별로 대꾸를 안 했다. 요즘 초등학생 표현을 빌려 말하면 아재들은 사실 ‘관종’일수도 있다. 표현할 방법을 몰라 그렇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2. 금성에서 온 여자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선물한다. 끝. 깔끔하다. 김지영 씨는 기분이 좋아졌고, 그 자리에서 립글로스부터 열어 발라 보았다. (p. 152)


  둘째가 “엄마, 예뻐.” 이러면 옆에 있는 첫째가 말한다. “누나 예뻐도 해봐.” 엄마와 누나 중 누가 더 예쁜지 묻는 질문에 둘째가 엄마라고 답할 때면 첫째는 풀이 죽는다. 남편에게서 “재인이가 더 예쁘지.”라는 답을 듣고서야 표정이 밝아진다. 일곱 살 딸아이만 봐도 안다. 여자에게 예쁘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샤이니 노래를 듣는데 기분이 좋다. 가사 속 ‘누난 너무 예뻐’라는 말이 귓가를 맴돈다. 자이언 티의 ‘노 메이크업’을 들으면 살 맛 난다. 나보고 너무 예쁘고 아름답단다. 여든 넘은 할머니에게 “할머니, 파마해서 예뻐요.”라고 말하면 수줍게 웃었다. 사람들은 그런 여자에게 예쁘다는 말을 너무 아낀다. 그러니 대신 샤이니와 자이언티의 노래를 듣는 수밖에.


“당신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소릴 하고 있어?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알았지?” (p. 105)


  김애란은 소설 「비행운」에서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라고 말했다. 보통 자녀가 부모의 삶 이상을 살기란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위해서는 한 세대의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소설 속 김지영의 어머니는 딸이 여자라는 제약 없이 살기를 바라며 애 쓰는 인물이다.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보고 나왔는데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말했다. “저럴 거면 애를 낳지 말든지….” 이전 시대의 어머니는 ‘여자는 이래야지’하는 가부장적인 것들을 내면화하고 딸에게 가르쳤다. ‘여자는 나대면 안 된다’도 그 중 하나이다. 그래서일까. “막 나대!’”라는 김지영 어머니의 말은 웃기면서도 조금 슬펐다. 또 이후에 막 나대면서 잘 해내야겠다고 결심하는 김지영이 걱정도 되었다. 5만원 지폐에서 자애롭고 인자하게 웃고 있는 신사임당의 모습이 가끔 부담스럽다. 여자는 나대지 말고 그렇게 얌전히 웃고 있어야만 할 것 같아서 말이다.


3. 금성에서 온 여자엄마 되다


  “그냥 하나 낳자. 어차피 언젠가 낳을 텐데 싫은 소리 참을 거 없이,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 낳아서 키우자.” 정대현 씨는 마치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사자, 라든가 클림트의 <키스> 퍼즐 액자를 걸자,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큰 고민 없이 가볍게 말했다. (p. 135)


  엄마가 되면 버려야 할 것이 많다. 질끈 묶은 머리, 화장기 없는 얼굴, 얼룩덜룩한 티셔츠, 무릎 나온 바지, 갈 곳이 없으니 화장을 할 필요도 옷을 살 필요도 없다. 아이가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되고, 아이를 재우며 엄마도 잠든다. 엄마라는 이름의 여자들은 모두 한 일이다. 아이가 태어나도 남자의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소설 속 김지영의 남편도 아이 낳자는 말을 쉽게 꺼냈을 것이다. 


  “나도 선생님 되고 싶었는데.” 엄마는 그냥 엄마만 되는 줄 알았던 김지영 씨는 왠지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아 웃어 버렸다. (p. 36)


  어린 시절 엄마가 없으면 못 살 것처럼 붙어 있다가, 중고등학생 시절 배고플 때 돈 필요할 때 아니면 엄마를 별로 찾지 않았다. 그러다 엄마가 되었다. 가끔은 엄마라는 이름이 버거워 실수도 하고 이것밖에 못 하냐며 자책도 한다. 또 가끔은 엄마라는 이름이 고마워 자랑도 한다.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못 하고 사는 게 참 많다. 이런 상상을 한다. 밤새도록 드라마를 몰아보고 정오쯤 일어나고 싶다. 언젠가 ‘나의 아저씨’를 보고 새벽 4시에 잤는데, 둘째가 7시에 나를 깨웠다. “엄마 조금만 더 잘게.” 애원하다가 눈을 찔리고, 배를 밟히고, 머리카락을 뽑혔다. 편하게 앉아서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밥 먹고 싶다. 둘째는 꼭 밥을 먹다가 화장실에 간다. 숟가락을 내려놓고 똥을 닦아야 한다. 친한 친구와 여행을 떠나고 싶다. 문학관에 가서 어른의 대화를 나누던 옛날이 그립다. “아, 외로워.” 몸서리 칠 때까지 혼자 있고 싶다. 외로움 끝에 남편과 두 아이가 사무치게 보고 싶을 때까지.


‘사람들은 왜 아이를 낳을까?’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생을 다시 살고 싶어서.’

누구도 본인의 어린 시절을 또렷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니까, 특히 서너살 이전의 경험은 온전히 복원될 수 없는 거니까, 자식을 통해서 그걸 보는 거다. -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아이를 낳고 어린 시절 사진을 꺼냈다. 그 시절 내가 궁금했다. 딸아이가 사진 속 나와 너무 닮아서 아이를 넋 놓고 바라본 적도 있다. 엄마와 함께 그 시절로 돌아갔다. “너도 돌 지나서 걸었어. 집 앞 화단에 서서 처음 ‘꽃’이라고 말했을 때 참 신기했어.” 딸과 나와 엄마는 시간의 연속선에 있다. 내가 딸아이를 통해 나의 서너 살을 보듯, 엄마 또한 나를 통해 자신의 서른, 마흔을 볼 것이다. 딸은 나를 통해 자신의 서른, 마흔을 보고, 나는 엄마를 통해 나의 예순, 일흔을 본다.


  내가 아이를 낳지 않았으면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엄마가 다려준 옷을 입고,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으며 나밖에 모르는 노처녀로 살았을까. 나는 아이를 키우며 ‘나’를 만났다. 내가 나를 어떻게 오해했는지, 그로 인해 다른 사람을 얼마나 곡해했는지 조금 알았다. 저마다 자신을 찾는 삶의 시간이 있을 것이다. 질병, 비혼 또는 이혼, 돌봄 같은 크고 작은 삶의 굴곡들. 그렇게 ‘나’를 만나며 조금씩 어른이 된다.


4. 나쁜 사람은 없다


  ‘82년생 김지영’ 영화를 통해 인물 저마다의 삶을 더 깊이 있게 만났다. 김지영 아버지는 밤늦게 연락을 받고 급히 딸 마중을 나간다. 낯선 남자 때문에 곤욕을 치른 것을 알고, 어디 가서 웃지 말라고, 짧은 치마 입지 말라고 딸을 채근한다. 아버지는 훗날 친구 개업식에 가서 아들 지석의 한약만 지어온다. 김지영의 남편은 명절이면 시댁 부산까지 당연히 내려가고, 큰 고민 없이 아이를 낳자고 했다. 김지영 동생 지석은 할머니와 아버지의 편애를 별 생각 없이 누렸다. 자신만 받은 만년필을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김지영의 아버지, 남편, 동생 모두 나쁜 사람은 아니다. 그렇게 배웠고 배운 대로 살았을 뿐.


  김지영의 병이 알려지자 모두 조금씩 달라진다. 아버지는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김지영의 한약을 짓는다. 남편은 아픈 김지영 앞에서 “너 나랑 결혼해서. 나 때문에 아픈 것 같아서”라며 눈물을 흘린다. 동생 지석은 지영이 갖고 싶어 했던 만년필을 건넨다. ‘82년생 김지영’은 그동안 아무도 보지 않았던 여자의 자리, 엄마이기 이전에 김지영이었던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도 그 자리가 사라졌을 때, 김지영처럼 생각했다. “어딘가 갇혀 있는 기분이 들어요. 처음부터 출구가 없었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면 화가 나기도 하고요.” 그 자리를 찾겠다고 남자의 자리를 빼앗아도 될까. 김지영의 남편 역을 맡은 공유의 부산 사투리가 정겹다. “자꾸 반하쟤. 살면 살수록 멋있쟤.” 세상에는 그런 남자가 더 많다.


- 조남주, 『82년생 김지영』, 민음사, 2016


Photo by Luma Pimentel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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