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지 않다
5. 누구나 아버지라는 짐을 안고 살아간다
어린 시절, 차라리 한바탕 싸움이 일어나고 나면 마음이 편했다. 크든 작든 꼭 한 번은 누군가 싸워야 해가 저물었다. 짙은 아픔이 밀려올 때면, 이불을 몇 겹 덮어쓰고 꺼이꺼이 울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다. “제 어린 시절은 꽤 불행했어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들이 모인 독서 모임 시간이었다. 그런데 ‘무서운 아버지, 무심한 엄마’는 하나의 공식처럼, 여러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다들 그렇게 힘들었지만, 가끔은 주저앉고 싶었지만, 잘 살아왔다. 술과 폭력, 외도까지 그 정도와 양상은 모두 달랐다. 드물게 “저희 아버지는 참 좋았어요.”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부모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부분 아버지라는 짐을 지고 있었다.
우리 가족은 주말 저녁이면 나란히 누워 TV를 보았다. 10살 무렵, 드라마 〈딸 부잣집〉을 함께 보는데, 양희경이 고추를 포대로 들고 가는 장면이 나왔다. 엄마가 소란스럽게 바닥을 치며 웃기 시작했다. ‘엄마도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구나.’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기억 속의 엄마는 늘 뒷모습이다. 주어진 삶을 감당하는 것만으로 힘겨워 고개를 돌릴 틈이 없었을까. 실컷 말을 해도 아무 답이 없고, 설거지와 빨래, 부업이 더 중요한 듯 얼굴을 돌렸다. 더러는 엄마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따졌다. 조금 더 크고 나서는 그것을 무심함이라 여겼다. 사랑이 아닌 것 같은. 나는 엄마 옆에 있어도, 늘 엄마가 그리웠다.
지금까지 한 번도 꺼내지 못한 말을 토해냈다. 입양을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분노가 되었다. 꼭꼭 숨겨 두었던 엄마에 대한 감정들이 와르르 쏟아졌다.
“몰랐어. 네가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 줄. 정말 미안해. 널 더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때는 엄마도 너무 어려서 잘 몰랐어. 아빠를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었어.”
- 김혜연, 서툰 가족, 114쪽
글은 사진보다 훨씬 긴 삶을 담는다. SNS에 올라온 사진 한 장이 삶의 하이라이트라면, 글은 길고 지루한 롱 테이크 영상이다. 하이라이트는 순간의 행복을 찍어내지만, 롱 테이크 장면에는 분노, 거짓, 두려움, 기쁨 모두 한데 섞인다. 삶과 가장 가까운 무편집본이라고 할까. 아무리 살아도 삶은 늘 서툴다. 오래된 상처의 흔적이 삐죽 솟아 나와 나를 뒤흔들곤 한다. 다행이다. 나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너만 그런 건 아니야.’ 서툰 삶을 있는 그대로 안아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