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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혜린 Feb 21. 2020

인생은 떡볶이 아니면 치킨

1. 둥글고 따뜻한 느낌표

첫 번째 문제는 어떻게 나가서 노인들을 돕느냐가 아니다. 어떻게 그분들을 이편의 삶 한복판으로 끌어들여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일 공간을 만들고,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가며 경청할 여지를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이다. 말씀을 전하거나 가르치거나 고치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보살핌을 받는 이들이 선사하는 것을 깨닫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예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치유란 본시 자존감이 회복될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닌가?

- 헨리 나우웬, 월터 개프니, 《나이 든다는 것》, 포이에마, 2014, 116쪽


  대학 진학과 취업을 앞두고, 여러 질문에 답해야 했다.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일?’, ‘자신의 장단점?’ 같은 ‘나’에 대한 질문 뿐 아니라, 사형제도, 안락사, 동성애 등 ‘나’와 관계없는 질문까지 모두 알아야 했다. 사실 ‘가장 힘들었던 일’은 대학 진학, 취업을 앞둔 그 순간이었다. 별 굴곡 없는 내 삶에 대해 그럴듯하게 답할수록, 현실의 나와 멀어졌다. 대학 시절 집행부 총무로 학술답사를 다녀왔던 일에 우여곡절을 더해 무용담을 완성했다. 사형제도, 안락사, 동성애에 대한 찬성과 반대 의견을 살피고, 가장 합리적인 것을 내 것처럼 외웠다. 어느 순간, 다른 이의 생각이 마치 내 것인 양 떠들었다.


  가장 당황스러운 질문은 이런 것이다. “이청준의 《축제》 아세요?” 순간 가슴이 뜨끔하다. 국문과를 나와도 모르는 문인, 읽지 않은 문학 작품이 수두룩하다. (참 많은 이들이 너무 많은 작품을 남겼다.) 작품은 몰라도 작가라도 안다면 다행이다. “《축제》는 안 읽어봤는데, 문학사 시간에 《병신과 머저리》는 배웠어요.”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작가도 작품도 처음 듣는 것일 때면 목소리가 한풀 꺾였다. “모르겠어요.”라는 답이 ‘전 무식자예요.’라는 고백 같았다. 답하지 못한 질문은 나를 초라하게 다. 대단한 ‘나’를 원하거나, 별로 고민해 본 적 없거나, 잘 모르는 질문 속에서 나는 늘 작아졌다.


  ‘모든 질문에 답해야 한다’는 신념은 세월 따라 더 단단해진다. 마흔, 쉰쯤 되면 지극한 혜안으로 삶을 내려다볼 수 있을까. 예전에 내가 겪은 문제를 고스란히 되풀이하고 있는 이를 볼 때면, 충고가 앞서 나간다. “라떼는 말이야.”(나 때는 말이야. Latte is horse) 정해진 틀 안에서 묻고, 답이 예상에서 벗어나면 가르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모든 인생은 다르다.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지고,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데, 나는 늘 인생의 모범 답안이 있는 것처럼 굴었다. 뻔한 질문에 정해진 답을 하며, 나와 점점 멀어졌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저 들어주는 것, 어떤 답을 해도 넉넉한 마음으로 품어주는 공감이었다.


마음씨 고운 친구한테 너무 큰 걱정을 끼쳤구나 싶어서요. 저는 그냥 하소연을 들어주고 이해해 줄 상대가 필요했을 뿐인데 말이죠.

- 123쪽


  할머니가 푸념하듯 일제 강점기, 6·25 전쟁 이야기를 할 때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 귀로 흘렸다. 할머니와 대화할 것이 없었다. 뉴스, 날씨, 생활 정보까지 스마트폰이 할머니보다 정확하고 빨랐다. 툇마루에 앉아 하늘과 바람을 느끼며, “이제 곧 비가 오겠구나.” 말해주던 노인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할머니는 “테레비도 볼 거 없다.”라며 어두운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러다 할머니는 오래된 이야기를 하나둘 꺼냈다. “그 년이 나쁜 년이지.”, “목걸이가 없어지고, 다음 날 가정부를 잘렸어. 누명을 쓴 거야.”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뒤돌았다. 듣다못해 할머니를 다그치기도 했다. “할머니, 그런 생각하면 안 되죠.” 그러나 할머니에게 필요했던 것은 한 마디 공감. 이제야 뾰족한 답 대신 둥글고 따뜻한 느낌표를 놓아본다.


Photo by Alfons Morale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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