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 모두 제법 자라서 이제 스스로 하는 일이 많다. 덕분에 남편은 친구들과 베트남으로 여행을 떠났다. 나와 아이들은 이틀 동안 시머어니 댁에서 잤다. “아빠 없는 동안 할머니 집에서 자면 하루 만 원씩 줄게.”라는 말은 솔깃했다. 할머니 집에 있으면 텔레비전 실컷 보고, 틈틈이 군것질까지 하는데, 돈까지 생기니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나 또한 시어머니가 구운 갈치와 훈제 오리를 먹으며, 시아버지가 펴놓은 이불에서 자며 호사를 누렸다. 그런데 이틀쯤 지나자, 두 아이가 안하무인이 되었다. 씻자고 사정을 하고, 먹자고 매달리고, 텔레비전 끄라고 부탁을 해야 겨우 움직였다. 분명 몸은 편하지만 마음은 점점 날이 섰다.
“엄마는 이제 집에서 잘 거야.” 두 아이를 설득해 집에 왔다. 재인이 친구 Y가 집에 놀러 왔다. 재인이는 신났고, 은산이는 속상했다. 재인이는 Y와 둘이 놀겠다고, 은산이는 자기도 같이 놀자고. 노는 시간을 정해주고, 달래도 보고, 혼내도 보고, 그러다 보니 해가 지고 있었다. Y가 돌아가고 청소를 하는데, 돌아서면 또 어질러져 있고, 두 아이는 틈틈이 싸웠다. 나는 결국 소리를 질렀다. “너희 이렇게 하루 종일 싸울 거야?” “앞으로 안 그럴게요.” 얼어붙은 공기가 녹을 때쯤 시부모님이 우리집에 왔다. 나는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고, 언제 그랬냐는 듯 웃었다. 시어머니가 돌아간 뒤, 내 목소리는 다시 차가워졌다. 씻기고, 치우고, 재우는 일이 태산 같았다. “엄마가 치우면 뭐해? 또 어질러 놓는데….” 푸념 섞인 낮은 목소리, 은산이가 물었다. “엄마, 할머니 가서 기분이 나빠? 속상해?”
남편은 베트남에서 돌아와 두 아이를 안고 흥겨운 춤을 췄지만, 이틀 만에 “이제 그만.” 정색을 하는 원래 아빠로 돌아왔다. 아이들은 여전히 눈만 마주치면 싸운다. 지나가려는데 동생이 길을 막아서, 하나씩 받은 젤리를누나가 나중에 먹어서, 남의 자리에 앉아서, 자꾸 귀찮게 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이르고, 캐묻고, 토라진다. (왜 사람들은 아이는 둘은 낳아야 한다고 했을까.) 나는 참다 결국 화를 냈다. 새해에는 ‘분노’라는 두 글자와 이제 좀 멀어지나 했는데, 내가 한심했다. “엄마는 정말 화내기 싫어. 그런데 왜 자꾸 엄마를 화나게 만들어.” 돌아서서 후회하고, 또 소리를 지르는 사건의 반복, 나는 지쳤다.
보살핌은 일차적으로 늙어가는 자기 자신에게 다가서는 길이다. 똑같은 한계를 나눠가진 모든 인간을 치유할 임을 얻는 자리 역시 바로 그 지점이다.
- 헨리 나우웬, 월터 개프니, 《나이 든다는 것》, 120쪽
한 걸음 물러선다. 화가 난 ‘나’에게서 조금 떨어져 묻는다. ‘넌 왜 그렇게 화가 나니? 두 아이가 싸우는 건 늘 있는 일인데, 매번 소리를 질러?’ 내 안의 ‘나’가 웅크린 채 답한다. ‘난 늘 행복했으면 해. 조금 더 완벽하게. 얼굴 붉히는 일 없이 웃고 싶어. 그런데 저 두 꼬마가 나를 자꾸 악마로 만들잖아. 난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나를 자꾸 건드리니까 더 화가 나.’ 그렇게 나 자신에게 다가가 본다.
세상을 강자와 약자, 도움을 주는 이와 도움을 받는 이, 베푸는 쪽과 받는 쪽, 독립적인 사람과 의존적인 사람으로 이분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는 한, 참다운 보살핌은 절대로 성립할 수 없다. 구분선은 끝없이 늘어나게 될 테고, 결국 노인들이 누구보다 먼저 고통을 당하게 되기 때문이다.
- 위의 책, 172쪽
나는 자주 무언가 구분 짓는다. “남자들은….”, “B형은….” 같은 말로 경계를 나누면 보다 선명해 지는 것이 있다. 나는 강자이자 도움을 주는 이, 베푸는 쪽이며 독립적인 사람이었다. 보통 상대는 약자, 도움을 받는 이, 받는 쪽, 의존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아이들은 더욱 그랬다. “너 할 일 해.”라고 해도 졸졸 따라다니는 두 아이가 성가셨다. 이제 한 걸음 떨어진다. 강자인척, 늘 무언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내모는 ‘나’에게서 한 걸음 떨어진다. 그렇게 몰아세울 필요 없다고, 우리 모두 한계를 지닌 인간이라고, 그러니 그렇게 구분 짓고 다그치지 말라고 말이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강자도 약자도 아닌, 도움을 주는 이도 받는 이도 아닌, 그저 하나의 사람 대 사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