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 늦여름의 학교, 오후 수업은 나른했다. 언제 집에 가나 시계만 바라보고 있는데, 부천 가스 폭발 사고가 일어났다.창문 저 멀리에서 거대한 불길이 올라왔다. 신기한 듯 구경하기엔 거센 불길이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창문에 금이 갔다. 옆 반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아빠 공장이 저쪽이야.” 순간 학교는 혼돈의 바다가 되었다. 아이들은 부모, 형제, 자매 이름을 부르며 주저앉았고 선생님도 갈피를 못 잡았다. 헬기가 뜨고, 곧 불길이 잡혔다. 친한 친구 중에 피해를 당한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날 처음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내 것이 되었다. 성수대교 사건, 상품 백화점 붕괴,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세월호, 모두 내 것일 수 있는 일들이었다. 그곳에 내가 없었다는 걸로 안도하기에 한국은 너무 좁고, 삶의 반경은 너무 넓었다.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순간, 손 내미는 사람이 있다. 은희는 김영지 선생님을 만나 숨을 쉰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은 이야기를 꺼낸다. 은희의 엄마는 은희가 오빠에게 맞았다는 말을 하자 “둘이 싸우지 마.”라며 넘겼다. 하지만 영지는 끝까지 싸우라고 말한다. 다행이다. 그런 사람이 있어서.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 한다는 것. 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 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 영지의 마지막 편지
스탠드를 집어던지며 몸싸움을 한 은희의 부모가 며칠 뒤 나란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던 장면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우리 가족도 다시는 안 볼 것처럼 휘저으며 싸운 뒤, 얼마쯤 지나 아무 일 없는 듯 밥을 먹었다. 소리 지르는소란함과 웃고 떠드는 평온함이 한 곳에 있었다. 은희는 병원에 입원했을 때 가장 편해 보였다. 자신을 좋아하는 이들이 찾아오고, 다른 이들의 호의를 받았다. 단단해 보이는 은희의 아버지가 딸의 수술을 앞두고 엉엉 울었을 때, 은희는 웃었을 것이다. 콩가루 집안에서도 나는 사랑받고 싶었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