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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Jul 25. 2022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읽고

책 읽는 우체통


 삶에는 어떤 흥분이 있어야 한다. 일상은 그저 지루한 일이나 노력의 연속만이어서는 안된다. 어제 했던 일을 하며 평생을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격랑과 같이 사나운 지금이다. 부지런함은 미덕이라지만 무엇을 위한 부지런함인지가 더욱 중요하다. 그저 바쁜 사람은 위험에 처한 사람이다. p58




   이전에 이 책의 저자인 구본형님의 ‘변화 경영 연구소’의 기수 과정을 마친 분을 하나 알고 있었다. 그분이 주관했는지, 구본형님이 주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티스트 웨이>라는 줄리아 카메론의 저서를 기본으로 해서 자기 개발(?) 프로그램을 하는 카페를 하나 알게 되었다. 그들처럼 매일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자기 성찰의 시간과 내면의 소리를 글로 옮겨 적는 과정을 오랜 시간 유지했으나 혼자 하는 것의 한계인지, 게으름인지 결국 중도에 포기한 일이 있었다. 그 작업은 이전에 내가 해왔던 일의 연속이었고 어쩌면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일인지 모르나 늘 같은 시간에 일정한 시간을 투자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라 같지만 다른 형식으로 현재에 있는 셈이다. 이 책 ‘익숙한 것과의 결별’은 꽤 오래전에 발표된 모양이다. 아트스트 웨이를 이끌었던 그분이 이 책을 읽고 변화의 필요성과 실천력을 절감해서 삶의 변화에 도달했다니 말이다. 오래 전에 소식을 알 수 없었던 그분은 여전히 이 모임을 이끌고 이 모임을 통해서 창업하고 ceo가 되어 여전히 활기 있는 삶을 살고 계신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분과 함께 했던 작업도 창조적이고 도전적인 일이었다. 그녀는 그 작업에서도 주인공이고자 했고 돋보이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맞지 않아 그 일을 그만 두었지만 지금도 하는 일에서는 그때 그녀가 맡았던 역할처럼 자신이 돋보이고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나 역시 그녀처럼 도전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했고 지금까지 해왔지만 그녀와 같이 가시적인 성과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나는 노력의 연속이라든가 그저 바쁜 사람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나는 오래 전에 글을 쓰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 대학을 다시 다녔고 작업의 연장으로 사진을 배웠다. 그리고 내 글쓰기의 형태와 사진 찍기와 다르지 않은 연극을 했다. 각각은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렇다고 괄목할만한 성취를 이룬 건 아니다. 다만 개인적인 만족을 얻는 정도에 그친 그 작업들은 내 삶을 풍요롭게 했다. 남들과 다른 삶을 살게 해준 것이 어쩌면 가장 큰 성취일지 모른다. 성과의 가치를 수치로 계산한다면 나는 마이너스다. 이 책의 저자처럼 무위한 일에 시간을 투자한 셈이다. 하지만 무형의 가치나 수치로 계산할 수 없는 성과를 따진다면 나 역시 변화를 기꺼이 수용하고 그렇게 실천한 셈이니 일련이 과정들이 쓸데없는 행위였다고 치부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결국 타인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변화는 외적인 변화보다 내면의 변화가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건 이 책의 저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껍데기는 많이 변한 것 같지만 실상은 별로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이 실패한 혁명의 참 모습이다. 인생은 단순한 것이 아니며, 변화하지 않아도 되는 수십 수백 가지의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변화와 개혁은 적은 많고 도와줄 사람은 부족한 가장 위함하고 어려운 일이라고 규정했다.p64




   변화를 막는 것은 외부가 아니라 실은 내면이란 건 자기 부정이나 자기변명이 우선을 차지한다. 저자도 개혁에 저항하는 다섯 가지의 유형을 이야기했는데 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은 조직도 아니고 그 개혁과 변화를 주도하는 사람 하나의 판단이다. 개혁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나 내일 해도 늦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나 불확실성과 이상주의만을 반복한다거나 과거의 실패를 예를 들어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행태나 말은 변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서 실천하거나 도와주지 않는 행위 모두는 결국은 조직이든 개인이든 그 주체가 되는 존재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또 변화의 과정에서 필요한 건 주변의 조력이다. 나의 변화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을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우린 무수히 많은 방해 요소들, 특히 남과 비교하는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창조적 파괴인 그 첫 발자국을 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 변화를 위한 개혁의 과정에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혼돈’을 간과할 수는 없다. 저자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자기 개혁이든 조직의 개혁은 일정 기간 손해가 오고 ‘혼란’이 올 수 있지만 그것은 잠깐에 그칠 것이고 멀리 내다보면 개인도 기업도 조직도 발전하고 더 큰 성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건 돈이라는 유형의 수입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돈을 목적으로 삼지 말라. 돈은 기업에게나 개인에게나 경영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시장 경제는 그 나름의 게임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 사려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을 때, 그 대가로 돈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항상 경쟁이 있다. 가장 잘 하는 사람이 가장 많이 가져가게 되어 있다. p170






   이렇게 말하면 변화와 개혁의 필요성에 대해 코웃음을 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경험에 비추어 봐도 결국 나의 만족은 어떤 유형의 물질보다 더 큰 만족을 준다. 삶이 풍요로워지는 건 돈과 바꿀 수 없다. 자기만족은 자존감을 높여주고 타인에 의해 쉽게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준다. 마음부터 늙어서 흔히 말하는 ‘꼰대’가 되는 걸 막는다. 변화하기 위해 두려워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공부하게 되고 변화를 쉽게 수용한다. 그건 젊은 세대와 소통 가능하게 하고 세상의 변화를 언제든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품을 준다.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 물질로 자기를 포장하지 않고 물질적 풍요에 자기를 굴욕적으로 내어놓지 않게 만든다. 신념이 있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언제든 행복하게 죽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다.




   신념이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이며 그것을 지킬 것이라는 믿음이다. 당신은 스스로의 리더다. 그러므로 스스로에게 책임을 져야 하며 또한 조직과 사회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한다. p204




   모든 위대한 비전은 위대한 가치관 위에 건설되어 있는 축조물이다. p208




   삶은 ‘그저 생존하는 것’ 이상의 것이다. 생존이 우선적 문제가 될 때 우리는 비참해진다.…… 당신은 평범한 사람일지 모른다. 그러나 모든 위대한 사람 역시 평범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을 가지고 있다. p226




   내가 좋아하는 화가 ‘장욱진’은 새와 개 그리고 어린이를 주로 그린 화가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작가가 얼마나 아이 같은지, 순수한지 상상하게 된다.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면 편안하다. 순진무구한 세계에서 마음의 평화를 찾고 동심의 세계를 떠올리고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한다.




   나는 남의 눈치를 보며 내 뜻과 같지 않게 사는 것은 질색이다. 나를 잃어버리고 남을 살아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점잖다는 말을 싫어한다. 겸손이라는 것도 싫다. 그러는 뒤에는 무언가 감추어진 계산이 있는 것 같다. 나는 그러므로 솔직한 오만이 훨씬 좋다. 먼저 자기 마음대로 해보는 것이 좋다. 그래야 참된 자기 것을 가질 수 있기에./장욱진




   저자는 말한다. ‘꿈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것은 꿈에 쏟은 시간의 양이다’라고. 물론 하고 싶지만 잘 하지 못하는 일이나 잘하지만 하기 싫은 일에 시간을 쏟으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것에 시간을 쏟으라고 하는 것인데 사실 이건 쉽지 않은 일이다. 어릴 적부터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물어보는 시간을 갖지 못한 세대와 한국 사회에선 어려운 일 중 하나다. 그렇기에 변화와 창조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 변화를 위해서 저자는 말하는 것이다. 익숙한 것과 결별하라고.




   책을 읽으며 그간 읽었던 자기 개발서와는 다르다는 점에서 가능하지 않은 노력을 기울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변화를 위한 자기 성찰, 조직의 변화를 위한 리더의 변화의 필요성 등 여러 면에서 유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이미 세상을 떠나 그가 이룬 성취를 나는 알 수가 없다. 그의 옆에서 그와 함께 했던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그가 말한 개혁을 통해 변화했으리라. 내가 알고 있는 분처럼. 하지만 그를 모르더라도 스스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그것의 결과가 유형의 물질과 지위가 아니더라도 삶의 풍요로움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의 책은 더욱 큰 도움이 될 것이고 그의 책을 모르더라도 충분히 잘 살고 있는 것이다.




   변화와 창조는 중심부가 아닌 변방에서 이루어진다. 중심부는 기존의 가치를 지키는 보루일뿐 창조 공간이 못된다. 인류 문명의 중심은 항상 변방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변방이 창조공간이 되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전제가 있다. 중심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어야 한다./ 신영복의 <담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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