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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Jul 25. 2022

'소설과 소설가'를 읽고

책 읽는 우체통


  소설가는 왜 소설을 쓸까. 소설을 써서 유명해지고 돈을 벌기 위해서?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그건 아닌 것 같다. 적어도 한국에서 소설을 써서 유명해졌다는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물론 몇 몇 유명 여성작가는 그 유명세가 외국까지 전해져서 꽤 돈을 벌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명성을 얻지도 유명세를 이용해서 돈을 벌지도 않고 있다. 그나마 학교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작가들은 교사 혹은 교수라는 안정적인 직업으로 해서 생계를 위협당하지 않지만 몇 편의 소설집을 내고서도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 소설집으로 생계를 책임지는 다른 직업을 얻거나 소설을 작파하고 아예 소설과의 인연을 끊은 사람도 있다. 예전에 나는 한 명의 소설가를 알고 있었는데 그는 소설을 세 권이나 낸 소설가였지만 지금 그의 책은 절판되었고 그의 이름은 더 이상 소설가들 중 하나로 거론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또 나이를 꽤 들어서 활동하는 작가도 많지 않다. 그것 역시도 안타까운 일이다. 벨기에의 영화 감독 ‘자코 반 도마엘’처럼 과작을 하는 예술가형 감독처럼 우리네 소설가도 그런 것이라면 다행이지만. 그런데도 왜 소설을 쓸까. 소설가의 숙명은 세상을 향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리고 그 할 말들은 꽤 귀 기울여 들어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도 꽤 있다. 그럼에도 어떤 소설가들은 잊혀지고 어떤 소설은 더 이상 읽혀지지 않는다.




   소설의 진정한 가치는 우리에게 삶이 바로 이런 것이라는 느낌을 얼마나 이끌어 내느냐에 따라 평가되어야 합니다. 소설은 삶에 관한 우리의 중심 사상에 호소해야 하고, 그러한 기대 아래 읽혀야 합니다. p34




   사람들이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는 삶이 소설보다 더 소설적이라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한다. 소설이 사람들의 삶을 담지 못한다는 의미기도 하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소설에 사람들의 삶은 사라지고 사람들의 웅얼거림만 남아 있다. 박상우는 ‘소설가’에서 우리 소설에 서사가 분명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그건 삶이 없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 아주 예리한 칼날로 삶의 단면을 잘라내도 거기에는 삶이 있다. 어떤 특수한 상황에 놓은 특수한 인물도 중요하지만 내가 만나는 혹은 내가 그 인물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때 우리는 더욱 공감할 수 있다.




   소설 예술에서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소설 주인공들의 개성이나 캐릭터가 아니라, 소설 속 세계가 그들 눈에 어떻게 보이냐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도덕적 판단을 내리려면, 우선 세계가 그 사람의 고나점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지식뿐만 아니라 상상력도 필요합니다. 소설가로서 나의 주된 임무는 모든 등장인물과 되도록 일일이 동일화되고, 그들 눈에 보이는 내 소설의 세계라는 것을 절대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p71




   결국 소설가는 끊임없이 소설을 통해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세계를 분명히 보여야 한다. 그것은 소설가의 삶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철학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소설가에게 윤리적인 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소설가가 따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소설가가 한 사회에서 존경을 받는다면 그에 따른 책임이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건 소설가의 몫이다. 소설가는 소설 속에서 방향을 잃지 않아야 한다. 앨리스 먼로는 이 점에서 탁월하다. 그녀의 소설엔 작가의 목소리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는 윤리적인 면을 강요하거나 도덕자를 자청하지 않는다.




   중심부는 삶에 대한 심오한 관점, 일종의 통찰입니다. 깊은 곳에 있는 실재 또는 상상의 신비로운 어떤 지점입니다. 소설가들은 이 지점을 탐색하고 그곳이 함축하는 바를 찾아내기 위해 소설을 씁니다.p147




   그럼 왜 독자들은 소설을 읽을까. 게다가 영상시대에 더 직설적으로 분명하게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더 많은 것을 보여주는 세상에서 굳이 활자화된 책을 통해 삶을 읽으려 드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살다보면 길을 잃기도 하고 누군가 내게 삶의 지혜를 가르쳐주었으면 하고 진지한 말걸기를 해주길 바라기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젊은 시절 나는 소설을 진지하게 여기면서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순문학 소설은 모든 것이 우리 손에 달려 있으면 우리의 개인적인 결정들이 모여 우리 삶의 형태를 갖춘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삶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인생에서 선택의 여지가 적은 폐쇄적인 전통 사회에서는 소설 예술이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소설 예술이 박ㄹ전하게 되면 인간의 사적인 감정, 감각, 선택들에 대한 치밀하게 구성된 문학 서사를 제시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끔 이끕니다.(중략)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대해서도 흥미를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젊은 시절 나는 끊임없이 소설을 읽으며 자유와 자신감이라는 감각을 충격적으로 경험했습니다. p62


한 편의 소설을 읽노라면 소설을 읽는 독자도 소설을 쓰는 창작자도 변화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이다. 비록 소설의 힘이 미약해서 그 변화도 미미할지라도 한 편의 소설은 독자에게 창작자에게 분명한 영향을 끼친다. 그렇지 않는다면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 한 편의 소설 작품이 감시의 대상이 되고 창작자는 구속되기도 하며 독자까지 위기에 처하는 상황이 되는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위대한 순문학 소설을 찾는 이유는 세상에서 길을 잃은 듯이 느끼고 삶의 의미를 알려 줄 지혜를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우주와의 관계가 단절한 현대인은 (이제 소박한 독자에서 성찰적인 독자로 변모한) 스스로 나아갈 바를 찾기ㅣ 위해 소설을 읽습니다.p154




   때로 삶이 어려운데 소설 속에서 삶의 진지한 태도와 깊이 있는 성찰, 지혜를 추구하고 읽었는데도 소설조차 어려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우린 소설을 읽는다. 그건 텍스트 속에 감춰진 그것이 삶에서 길을 잃은 우리보다 더 쉽게 우리에게 잡히기 때문이다. 우린 그저 읽으면서 텍스트를 통해 소설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진지하게 대화하려고 귀와 눈과 마음을 열어놓기만 하면 된다. 현실에서 그런 엉뚱한 말을 할 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해도 소설 속에서 창작자는 우리의 마음 속 소리를 들을 자세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린 창작자와 독자로서 진지한 대화를 한다.




   어떤 소설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의 어려움은 작가의 의도나 독자들의 반응을 파악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텍스트 속 지식들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고 텍스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알아내는 데 있습니다. 소설가는 독자가 이래저래 해석하리라 추측하며 텍스트를 쓰고, 독자 역시 소설가가 이래저래 추측하면서 썼겠지 하고 추측하면서 읽는다는 것을 절대 잊지 맙시다.p137




   이 책은 하버드 대학의 강연록이다. 이 책 속에는 위대한 문학가의 작품과 함께 소설가의 입장에서 무엇을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작가적 고민과 작가가 되기까지의 소설을 읽는 독자로서 무엇이 소설가가 되게 만들었는지까지 적혀있다. 가볍게 읽혀지지만 결코 가볍지 않다. 특히나 소설이든 쓰는 작업을 하는 사람에겐 결코 가벼울 수 없다. 작금에 쓰는 걸 직업으로 하려는 사람이 많아지는 걸 보면서 왜 쓰는지는 왜 읽는지와 더불어 생각해 볼 일이다. 그만큼 할 얘기가 많다는 건(굳이 상대가 있는 대화를 피하고) 소통의 부재라는 다소 진부한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점점 소외가 일상화되어 가고 있는 시대에 인간이 더 이상 지구상에서 가장 고등한 존재인가를 물어야 할 시대에 소설의 역할은 축소되고 있으나 여전히 그 역할은 유효하다. 물론 많은 소설이 오르한 파묵이 이야기한 소설에 해당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요구는 수요를 낳고 덜 심각한 소설에서 더 심학한 소설까지 독자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창작자도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책을 쥐고 순식간에 읽었지만 두고두고 읽어볼 일이다. 하긴 이런 류의 책이 찾아보면 굉장히 많다. 그걸 다 읽어본다면 제대로 된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알 수가 없다. 오늘도 물음표 하나를 던져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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