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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Jul 25. 2022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고

책 읽는 우체통

신영복 선생님께

2017.5.26.


  선생님, 돌아가신지 이제 일 년하고도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선생님이 1988년 특별사면으로 가석방되어 감옥을 나온 해에 이 책은 출판되었습니다. 아마도 저는 1989년 쯤 이 책을 구입한 듯합니다. 그때 책을 사서 읽고 30년이 흐른 지금 다시 이 책을 잡았습니다. 낡은 책에서 풍기는 오래된 종이 향과 책 모서리의 붉게 바랜 모습까지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책을 다시 펼치며 여러 마음이 교차했습니다. 그동안 나는 몇 번의 이사를 했고 수많은 책을 버렸음에도 이 책은 왜 버리지 못했는지, 아마도 선생님의 글이 제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고 다른 책들처럼 쉽게 버리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당시에 저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곳을 그만 두어야 하는 생각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세상은 급변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 중 영어의 필요성을 느끼고 미국으로 늦은 유학을 떠난 이도 있었고 중국이 세계무대에서 서서히 그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시점이었습니다. 종교단체에서의 직장 생활은 제게 안정적이고 편안함을 주었지만 종교적 확신이 없던 시기라서 저는 많은 고민이 있었습니다. 세상은 급하게 돌아가고 컴퓨터가 많은 일을 대신해줄 걸 예측할 수 있는 그 출발점에 있던 때였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이념의 갈등으로 시끄러웠습니다. 올림픽을 치루었지만 우리의 입장이 이전보다 나아진 것은 없어 보였습니다. 여전히 인권은 땅바닥이었습니다. 노동운동을 하던 친구에게서 받은 정서적 실망감으로 학생운동을 하는 사람에게서 약간의 반감을 갖고 있던 때 나의 가치관도 심하게 흔들렸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강권이라고 핑계를 대며 선을 보러 다니면서 대충 괜찮은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려고 생각도 했습니다. 지금껏 제 문제였던 비겁함과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살면서 제가 겪는 많은 문제들은 그런 유약함과 우유부단함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남편의 고향인 의령군에서 태어나셨더군요. 학문이 깊으신 아버님 밑에서 공부하신 환경은 선생님의 학문이나 사유의 깊이를 만들어주었겠지요. 아버지의 영향력은 아들에게 무시할 수 없는 큰 힘인 거 같습니다. 밀양에서 성장하며 한국전쟁 당시 좌익청년들이 서북청년단원들에게 무자비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다는 이야기는 선생님의 연보를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사상이 무엇인지 잔인하게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서 인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삶의 순간순간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하곤 합니다. 선생님이 옥중에 계시며 여름 징역에 대해말씀하신 부분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미워한다는 사실, 자기의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으로부터 미움받는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일입니다. 더욱이 그 미움의 원인이 자신의 고의적인 소행에서 연유된 것이 아니고 자신의 존재 그 자체 때문이라는 사실은 그 불행을 매우 절망적인 것으로 만듭니다.(p93)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시대에 더 이상 이념의 갈등이 사라진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타인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온전한 가정에서 사랑만 받고 자라도 부족할 아이들이 부모의 무관심과 사회의 무한 경쟁이라는 틀 속에서 여전히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걸 확인하며 살고 있기도 합니다. 선생님은 눈에 보이는 벽에 갇혀 오랜 세월을 보내셨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이 지적하신 자기 혐오에 빠져서 부당한 증오심을 키우고 그것이 사회에서 범죄로 드러나는 것들을 우린 미디어를 통해서 접하게 됩니다. 왜 우린 여전히 불행한지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이토록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불만과 증오심을 키우는지. 아마도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본질적 문제들을 외면하고 살아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 남북 분단의 현실,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 경쟁, 물질 만능주의, 부정부패 등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덮어두고 눈에 보이는 성장만을 쫓다보니 지금껏 우리는 삶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 제대로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갖지 못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시험을 위한 공부보다는 인격 도야를 위한 공부, 스스로의 성장을 위한 성찰이 필요한데도 그런 시간을 갖는 것이 죄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선생님은 그러셨습니다. 그 사람의 삶의 조건에 대해 무지하면서 그 사람의 사상에 관여하려는 것은 무용하고 무리하고 무모한 것입니다. 더욱이 그 사람의 삶의 조건은 그대로 둔 채 그 사람의 생각만을 다른 것으로 대치하려고 하는 여하한 시도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폭력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도는 삶과 사상의 일체성을 끊어버림으로써 그의 정신세계를 이질화하고 결국 그 사람 자체를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한동안 성매매를 하던 여성분들과 알고 지내고 지금도 종종 그분들의 소식을 듣습니다. 여성이 몸을 수단으로 삼아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대해 사람들의 오해는 그녀들의 방종한 성에 대한 태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들도 평범한 여성들처럼 몸을 팔아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대해 수치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자아 존중이 너무나 낮은 상태에서 서로 상처주고 자신을 함부로 여기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녀들은 가족 내 폭력에 노출되었고 어려운 살림 때문에 가족을 대신해 팔려갔습니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여자들이 성노예로 일본군에게 팔려간 것처럼 독립을 한 상태에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몸을 팔아야 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처럼 그녀들의 배경을 무시한 채 중산층의 윤리 의식으로 그녀들을 평가하고 폄훼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런 일은 몸을 파는 여성들뿐이 아니라 허드레 일을 하는 남성들을 향해서 같은 시선일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불평등은 빈곤의 문제뿐만 아니라 윤리 의식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편견으로 빚은 폭력과 위선도 문제입니다. 어쩌면 선생님이 살아계셨다면 우리 사회의 많은 모순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표현하셨을 겁니다.


자기 짐이 많은 사람은 남의 일손을 도울 겨를이 없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빈손이 일손입니다.(p76)


   이 말은 참으로 많은 의미를 제게 줍니다.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거둔 남편과 살면서 경제적 어려움이 없어지면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욕심은 더욱 커져서 오히려 나보다 어려운 사람에 대해 덜 생각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크면 클수록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조건이나 배경을 보기 보다는 그들과 어울리지 않는 핑계를 대는 저를 발견하곤 소스라치게 놀라기도 합니다. 내가 얼마나 위선적인 사람인지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의 말씀, 용기는 선택이며 선택은 골라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한쪽을 버리는 일(p77)이라는 말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말일 겁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시대를 열려고 지난 몇 달을 숨가쁘게 지나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앞에는 보이지 않는 벽들이 존재합니다. 그 벽을 깨기 위해서 우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용기를 실천하려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흔히 지식인들이 세상을 바꿀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 지식인 중에는 책에서 얻은 지식에 기대어 자신의 이익 추구에만 마음 쓰는 이들이 많습니다.


   책에서 얻은 지식이 흔히 실천과 유리된 관념의 그림자이기 쉽습니다. 그것은 실천에 의해 검증되지 않고, 실천과 함께 발전하지도 않는 허약한 가설, 낡은 교조에 불과할 뿐 미래의 실천을 위해서도 아무런 도움이 못되는 것입니다.


   지식은 실천에서 나와 실천으로 돌아가야 참다운 것이라 믿습니다.

   지식은 책 속이나 서가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리된 경험과 실천 속에, 그것과의 통일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라 믿습니다.(p242,243)


   많은 이들이 학창시절에 성실하게 공부한 것으로 획득한 학력과 그에 따른 수혜로 평생을 떵떵거리며 살면서 지식인인척 하며 패거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특권층을 만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들 중에서 그들 패거리에 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으나 대체로 많은 이들이 끼리끼리 문화를 만들어 그들이 획득한 지식을 소비합니다. 용기 있는 선택을 하거나 타인을 위해서 빈손이 되어줄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살기 바쁜 사람들은 그들대로 지식인들은 지식인들대로 자신의 밥그릇만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어쩌면 젊은이들이 헬조선이란 이름으로 한국 사회를 비하하게 된 것도 지식인들이 그들의 소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까닭도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도 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아주 없지는 않아서 우리는 때로 고민하고 불의에 항거하며 현재를 만들었지만 여전히 많은 문제가 상존하고 있음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고 많은 부분에서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받고 많은 부분에서 숙연해집니다. 지금 우리들이 고민하고 있는 것들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오래된 숙변과도 같은 문제들이고 선생님과 같은 지식인이 있고 함께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그나마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우리의 문제를 함께 풀어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나는 종종 인간에 대한 질문과 나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란 존재가 이 세상에 온 까닭은 무엇인가. 내가 어떤 쓰임을 위해서 태어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나를 성장시킬 수 있을까. 선생님께서는 ‘나’라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에 억눌려 무척 작아졌을 때 일어나는 불티 같은 순간의 생각이며 물에 이는 거품과 같은 것, 찰나이며 허공인 나를 버림으로써 대신 무한히 큰 나를 얻고, 더 큰 고통을 껴안음으로써 작은 아픔들을 벗는 진지와 해탈, 불꽃을 돌에 돌려주고 거품을 물에 돌려주고 빈비사라 왕의 마음을 백성들의 불행에 ㅜ돌려 주려는 싯다르타의 뜻과 한 뿌리의 열매(P26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삶의 말미에서 돌이켜보면 ‘나’란 존재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버릴 것을 깨닫게 될텐데 그 순간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며 부질없이 방황하고 행동하는지. 이제 세상을 뜨신 선생님은 제가 묻는 질문들을 더 이상 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존재에 대해서도 부질없는 욕심에 대해서도.


   저마다의 삶의 터전에 깊숙이 발목 박고 서서 그 ‘곳’에 고유한 주관을 더욱 강화해가는 노력이야말로 객관의 지평을 열어 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곳’이 바다로 열린 시냇물처럼, 전체와 튼튼히 연대되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고의 동굴을 벗어나는 길은 그 삶의 터전을 선택하는 문제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P247)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선생님이 감옥에 갇혔을 때와 다른 시대가 열렸습니다. 우리는 어렵게 자유를 얻었으나 그 자유의 고마움을 모르고 그 자유를 반환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것을 쉽게 돌려주지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불안합니다. 그간 많은 횡포를 저질렀던 우리 사회의 본질과 삶의 가치를 흐뜨렸던 사람들이 여전히 힘을 과시하면서 우리를 과거의 자리로 돌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우리는 또 다시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빈손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 모든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두렵기도 합니다.


   선생님, 우린 오랜 세월 많지 않은 정신적 스승을 책을 통해서 신문의 기사를 통해서 만났습니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이후 더 이상 정서적으로 지식으로 삶의 태도에서 스승의 역할을 할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할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처럼 나와 조국과 인간에 대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이라 믿습니다. 선생님의 글 속에 담긴 아름다운 우리 말에 답이 있기도 합니다. 작은 틈을 통해 잠깐 비치는 햇볕이란 의미의 볕뉘라는 아름다운 우리말처럼 언제나 작은 틈을 비집고 선생님처럼 우리들에게 용기를 내서 선택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 믿습니다. 새삼스럽게 다시 읽은 책에서 선생님의 가르침이 주신 의미의 깊이를 다시금 깨닫습니다. 제가 이 책을 버리지 못한 이유를 발견합니다. 이렇게 다시 읽음으로써 잊고 있었던 것들을 깨우치게 되었으니까요. 선생님이 계신 곳에서는 옆 사람의 온기 때문에 상대를 증오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오히려 함께 해서 행복한 사람들만 있을 거라 믿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중에 마음에 박히는 부분 한 단락을 정리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선생님이 계신 그곳에 저의 아버지, 어머니도 계십니다. 그분들께 제가 잘 살고 있다고 안부 전해주십시오.


   머리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이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것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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