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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Jul 25. 2022

'라틴어 수업'을 읽고

책 읽는 우체통

   Deus non indiget nostri, sed nos indigemus Dei.

   데우스 논 인디제트 노스트리, 세드 노스 인디제무스 데이.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  



  불행을 일상으로 사는 사람들은 말한다. “왜 내게만 이런 불행을 주는 건지, 내가 뭘 잘 못 했길래.” 나도 그런 말을 많이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 우리는 신을 원망한다. 진짜 신은 있는가. 어쩌면 라틴어 명제인 위의 문장처럼 정말 신이 우릴 필요로 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해서 만든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신의 존재가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될까 생각해 본다. 신이 인간을 다 케어할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내주셨다는데 그 어머니마저 안계시면 결국 우린 또 신을 찾게 된다. 이렇게 종교는 없는 사람에게, 핍박 받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해 보이지만 실제로 종교를 절대적으로 이용한 사람들은 권력자들이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내게 라틴어는 종교와 함께 시작한다. 어렸을 적 엄마 손을 잡고 처음 갔던 성당에서의 의식에서 들었던 몇 개의 단어들, 쌍뚜스니, 하는 단어들은 라틴어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래서 처음 ‘라틴어 수업’이란 책 제목을 보고는 진부하고 답답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책을 잡는 순간부터 책에 빠져 순식간에 책 한 권을 읽었던 것 같다. 

   일단 이 책은 어려운 라틴어를 가르치는 교본이 아니다. 라틴어를 기반으로 하는 에세이에 가깝다. 저자인 한동일 교수가 서강대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쳤던 내용 중 함께 나누고 싶었던 부분을 다시 정리해서 책으로 편집했다고 하는데 책을 덮고 나면 한동일 교수의 수업을 직접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라틴어가 영어나 불어의 뿌리이기도 하니 비슷한 의미를 가진 단어도 있어서 일견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저자가 지적한대로 격변화, 수변화 등 동사 하나에 변화가 160개에 달한다니 그 수에 기가 질리기도 한다. 아마 배운다면 이틀도 되지 않아서 나가떨어지지 않을까 싶다. 


   Non efficitur ut nunc studeat multum, sed postea ad effectum veniet.

   논 에피치투르 우트 눈크 스투데아트 물툼, 세드 포스테아 아드 에펙툼 베니에트

   지금 많이 공부해서 결과가 안 나타나도, 언젠가는 나타난다. 


   저자는 동아시아 최초의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라고 한다. 700년 역사상 930번째로 선서한 변호사라고 하니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 년에 한 명 되는 변호사가 된 사람이다. 저자는 자신을 공부하는 노동자라고 말한다. 일정한 시간에 일정하게 노동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 공부 때문에 몸이 아프고 공부를 멈춰야 할지도 모를 위기를 겪었다니, 나의 노력이 부끄러워진다. 노력하는 사람은 자신의 노력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신보다 더 노력하는 사람을 만날 때 노력이란 것이 얼마나 주관적인지 알게 된다. 저자의 말대로 공부는 단발적인 행위로 결과를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강약 조절과 리듬 조절이 필요한 것이 공부라고 저자가 말했지만 어디 공부 뿐이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삶을 살아가는 태도, 직장에서의 일을 임하는 자세 모두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공부하는 과정 중에 끊임없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격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그것이 좋은 두뇌나 남다른 집중력보다 더 중요한 자세라는 저자의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공부하는 습관의 부족도 그렇지만 원하는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을 때 스스로 자책하고 절망하는 것이 가장 큰 벽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나친 자기애는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겠지만 자존감을 갖고 스스로를 격려할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면 당장의 실패에 쉽게 절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공부에 그토록 중요한 자산이란 저자의 이야기는 공부를 강요당하는 우리 시대의 청소년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려면 자아가 강해야 하는데 강요된 삶을 사는 청소년이 강해지기는 참 어려운 주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습관이란 누군가에 의해 강제되는 것보다 스스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결국 고통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의 표시입니다’(p87) 살아있음을 표시하고 싶지 않은 영혼이 많은 우리 시대, 우울한 부분이기도 했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포스트 코이툼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에스트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 


   이 책의 ‘라틴어 수업’이란 제목에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이란 수식어가 붙어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이 수식어의 의미가 분명해 진다. 아름다운 삶이란 말이 지혜로운 삶의 다른 말이 아닐까 싶다.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는 말은 의미하는 것이 크다. 가장 큰 쾌락이라도 그 후의 우울은 쾌락의 크기만큼이나 클 것이다. 어디 성교뿐이랴. 원하던 대학을 진학하고 나서, 원하던 직장에 들어가고 나서, 원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나서, 원하는 집을 사고 나서, 원하는 것을 얻고 나서 그것이 주는 기쁨이 우리가 꿈꾸던 것만큼 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도 일상 중의 하나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우린 때때로 내가 누리는 것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서 타인에게 자랑하듯 늘어놓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조차 얼마나 무가치하고 허망한 일인지 뱉어놓고 보면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 타인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하고 타인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한다. ‘소확행’을 꿈꾸는 사람들의 밑바닥에도 이런 것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우린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카르페디엠, 쾀 미니뭄 크레둘라 포스테로/오늘을 붙잡게,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고)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큰 집에 많은 살림을 붙잡고도 쓸쓸해지고 외롭다면 다 버리고 심플하게 살아보는 기쁨을 누려볼 일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저자처럼 나도 믿는 게 있다. 우린 그저 지구의 삶 속에 하나의 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티끌처럼 오점처럼 있는가, 지구의 삶을 살찌우는 점이 되는가는 내가 삶을 대하는 태도에 달라질 것이다. 오늘 얻지 못한 것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충실했다면 그게 어느 때가 되더라도 결과를 맺을 것이다. 그리고 우린 무한한 시간을 약속 받은 게 아니라 유한한 삶을 살고 있다. 우리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시시각각 깨닫는다면 헛되이 살 수도 죄지을 삶을 살지도 못할 것이다. 삶이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 


   Si vis vitam, para mortem.

   시 비스 비탐, 파라 모르템.

   삶을 원하거든 죽음을 준비하라. 

   Dum vita est, spes est.

   둠 비타 에스트, 스페스 에스트

   삶이 있는 한,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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