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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Aug 01. 2022

'시적 정의'를 읽고

책 읽는 우체통

‘시적 정의’를 읽고  


 좋은 문학은 우리에게 격렬한 감정을 일으키고, 불안을 야기하며 당혹스럽게 만든다. 이는 전통적인 경건함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자신의 생각과 의향을 자주 맞닥뜨리게 되는 고통을 가져다준다.(중략)

소설은 살아있는 형태를 지니며, 사실상 여전히 그 중심은 도덕적으로 심오하면서, 우리 문화에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끄는 허구 형식이라는 것이다.p34,35 


  사람들이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무엇을 기대하고 책을 접할까. 또 문학작품을 써내는 작가들은 독자들에게서 무엇을 기대하며 책을 쓸까. 그것은 문학을 하는 나에게 오랜 질문이었다. ‘마사 누스바움’은 법학자이다. 그녀의 ‘시적 정의’는 나의 그런 질문에 아주 조금이지만 대답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일부의 독자는 수긍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학이 지나치게 도덕적인 것을 경계하는 사람들, 높은 창의력과 상상력에 기대에 윤리적으로든 철학적으로든 독자의 몫으로 넘겨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에겐 지나치게 성스럽고 도덕적인 문학은 재미가 없을 수 있다. 하지만 묘사가 그렇지 않더라도 주제가 그렇지 않더라도 작가는 일정한 의도를 가지고 집필을 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이 책의 분석 대상 작품들이 지나치게 오래된 작품을 예로 들었지만 어쩌면 산업혁명 이후 물신화되어 가는 사회에서 공리주의가 태동한 영국을 배경으로 써진 소설로 ‘정의’에 대한 논의를 한 것은 적절한지도 모르겠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역시 ‘공리주의’를 중점적으로 비판하고 있으니 말이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은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시민혁명도 산업혁명도 결국은 계급을 타파하고 누구나 잘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지만 현재에 와서는 신계급을 만들고 있고 그것은 더욱 첨예화하고 있으니 인간이 갖고 있는 본성은 늘 그런가, 하는 자조적 태도를 갖게 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 동시대 사람들의 고통, 특히 가난한 사람들이나 사회의 소수자들에 대한 고민이 없다면 또 불의에 대한 의식이 없다면 작가적 고민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봐야 할 것이다. 


  이 책에서 누스바움은 ‘분별있는 관찰자로서의 독자’의 중요성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건 이 사회를 위해서 정말로 바람직한 일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문학작품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 대한 고민을 함께 하지만 실제로 그런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현실적인 어려움일 것이다. 또한 시대적으로 변해가는 가치관 때문에 우리가 논의되어지는 것들이 한정적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문학은 인문학적 상상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고 결과물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과 함께 감상했던 ‘어떤 시선’이란 극영화는 영화라는 도구를 통해 장애인, 노인, 종교적 신념으로 인한 병여 거부자 등 한국 사회의 소수의 목소리를 담담한 스케치로 그린 게 감동적이었다. 옴니버스 형식이지만 충분히 사람들과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주제와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올리버 트위스트’는 원작보다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해서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제대로 드러나지는 않은 것 같아 아쉬웠다. 물론 그의 작품을 통해 고발되어진 시대적 상황은 충분히 산업사회가 가져올 수 있는 부조리한 상황이 잘 드러나 있지만 현실은 그처럼 행복한 결말을 맞는 것이 쉽지 않다. 오히려 행복한 생각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더 쉽기는 하다. 재미있는 건 누스바움이 지적한 재판관의 문학적 상상력이 영화에서 ‘올리버 트위스트’가 도둑으로 몰려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재미있게 대비되었다. 사실 문학적 상상력이란 어쩌면 법을 집행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인문학적 소양과 자비심과 공감 능력일 것이다. 그것이 부재했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영화에서는 우스꽝스럽게 잘 묘사되어 있다. 그건 현재 한국에서 벌어지는 사법농단과 다르지 않다. ‘어려운 시절’에 ‘비쩌’와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판사, 검사가 되어 조직 폭력배처럼 법의 수호자인 듯 자청하지만 법을 알고 그 망을 벗어나는 방법까지 알아 교묘한 범죄를 저지르는 많은 법조인이 떠오른다. 혈색 없는 얼굴에 차가운 눈, 숫자와 명확한 정의를 읊어대는 비쩌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건 이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이 공부하는 기계처럼 양성화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겪는 많은 일들을 겪으며 공감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그런 점에서 나만 아는 이기심으로 가득한 한국 사회의 지금의 모습은 안타까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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