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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Aug 01. 2022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책 읽는 우체통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위, 살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돈 벌고 명성을 얻는 걸 자기 생의 목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한 부류는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그걸 목표로 삼는 사람들이지요. 이 사람들은 인간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가르치려 하고, 사랑과 선행을 독려하지요. 마지막 부류는 우주 전체의 삶을 살려는 목표를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우주 만물, 우리는 모두 하나다. 우리 모두는 무시무시한 하나의 싸움에 가담한 하나의 실체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요. 무슨 싸움일까요?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p387




   요 근래 나는 혼곤의 상태다. 우울의 상태다. 인간에 대한 절망이 끝을 모르게 내려가고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아무리 던져도 답이 없다.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딜레마에 빠져서 나는 삶이라는 것에 대해 사랑이란 것에 대해 다시금 돌이켜 보곤 했었다. 그리고 내 안의 분노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 바다를 가기도 하고 무조건 차를 몰고 돌아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답을 찾을 수가 없다. 어쩌면 살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일 것이다. 두 질문 모두 인간이란 질료의 문제이기도 하고 인간의 정신 세계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상태에서 읽은 <그리스인 조르바>는 인간이 갖고 있는 속성에 대해서 내가 너무 큰 기대를 걸었던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면 어쩌면 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아주 오래 전에 구입해서 읽었던 책이다. 책이 잘 넘어가지 않았고 띄엄띄엄 읽어서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책도 읽어야 할 시기가 있는듯, 내게 <그리스인 조르바>는 내 것이 될 수 없는 책이었다. 나는 이 조르바,라는 사내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식하고 자만에 차 있으며 여자를 함부로 여기고 괜히 목소리만 큰 이에게서 니코스 카잔차스키는 어떤 매력을 느꼈던 것일까,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책장 한 구석에서 오랫동안 돌아다녔던 그 책은 어느 날 다른 책들과 함께 버려졌다. 읽어도 내 것이 안된 이 책을 다시 읽게 되면서 저자 자신인 ‘나’와 ‘조르바’를 통해서 혼돈의 세계에 살아가는 방법과 삶을 견뎌낸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돌이켜보게 된다. 작가 니코스 카잔차스키의 작품 세계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세 명이라고 한다. 호메로스와 앙리 베르그송, 니이체인데 그 셋에게서 니코스 카잔차스키는 자기 내부에 잠재하는 인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이르기까지 드높이고, 신을 통해 구원을 받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육체와 영혼의 상호 작용을 통한 심화와 확장으로 삶을 풍부하게 하고 존재에 대해 그 가치를 드높이는 과정을 작품으로 구현한 작가라고 한다. 그것은 58세의 나이에 <그리스인 조르바>를 창작하여 이 작품을 통해 보여준 ‘조르바’라는 인물을 통해 인간에게 있어서 진정한 자유와 삶을 초극하는 자세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




   조르바는 학교 문턱을 넘어본 적도 없는 사내이다. 그럼에도 “그는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p95) 작가 자신을 투사한 ‘나’는 책벌레라는 조롱을 듣고 행동하는 사람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크레타 해안의 갈탄광을 개발하러 떠난다. 다짜고짜 자신을 데리고 가라는 ‘조르바’라는 사내에 나는 끌린다. 그의 기이한 행동과 통쾌한 대화, 강렬한 시선에 끌린 ‘나’는 그와 크레타 섬에서 오두막집을 지어 자유로운 동거를 시작한다. ‘알렉시스 조르바’는 60대의 노인이지만 젊은이 못지 않은 패기와 열정을 지녔지만 세상의 온갖 풍파를 거친 삶에 대한 남다른 시선의 소유자다. 산루트를 연주하고 호기롭게 춤을 추며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참 자유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마음에 드는 여인을 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조국을 위해 전쟁에 나가 이유없이 사람을 죽이는 행위에 혐오를 느끼고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책 속에 파묻혀 삶의 진실을 외면하는 ‘나’에게 충고한다. 위선에 쌓인 종교인들을 비웃고 신의 무정함을 비난한다. 그는 낮에는 갈탄광의 인부들을 지휘하고 ‘나’와는 삶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조국에 대해서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다. 무수한 책을 읽고 자신만의 사유의 세계를 지녔다고 생각했던 ‘나’는 무학의 그의 생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과 통쾌한 태도에 무한히 끌린다. 수십 년간 책을 통해서도 도달하지 못한 세상의 비밀을 조르바는 자신의 본능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 쉽고 단순한 방식으로 살면서 살아있는 언어로 나에게 자신의 세계를 쏟아낸다.




   ‘확대경으로 음료수를 들여다보면 물에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쬐그만 벌레가 우글거린답니다. 보고는 못 마시지. 안마시면 목이 마르지. 확대경을 부숴 버려요. 그럼 벌레도 사라지고, 물도 마실 수 있고, 정신이 번쩍 들고!’(p177)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겉으로 보기엔 그럴싸하다. 그러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온갖 추악하고 더러운 것들로 가득차 있다. 삶이란 그런 형편 없는 것들을 견뎌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루하루 견뎌내면서 살아가는 동안 내 육체와 정신이 비루하지 않을 정도로 지쳤을 때 홀연히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린 무언가 거창한 것이 숨겨져 있는 것처럼 허망한 것들을 쫓고 그것을 획득하기 위해 삶의 추악한 민낯을 그대로 마주하려고 한다. 그런 것들에 집착하면 집착할수록 우리는 죽음의 순간이 두려워진다. 자신이 추구한 것들의 허망함을 본능적으로 깨닫는다고 할까.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는 자신에게 묻지요. <조르바, 지금 이 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잠자고 있네.<그럼 잘 자게.><조르바, 지금 이순간에 자네 뭐 하는가?><일하고 있네.><잘해 보게.><조르바, 자네 지금 이 순간에 뭐 하는가?><여자에게 키스하고 있네.><조르바, 잘해 보게. 키스할 동안 딴 일일랑 잊어버리게.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없네. 자네와 그 여자밖에는. 키스나 실컷 하게.>(p389) “야망이 없으면서도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말처럼 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 얼마나 단순하고 아름다운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도 고려하지 않고 현재에 충실한 것, 계산도 꾸밈도 없이 현재를 살아가는 것, 다 타버릴 것처럼 현재를 노동하는 것의 가치.


   나는 어떻게 살아 왔던가. 주인공 ‘나’의 탄식과 다르지 않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을 꼭 붙들고는 놓치지 않으려 했다.’(p428) 책 속에 담겨있는 지혜는 아무 것도 해결해주지 않지만 책을 통해서 많은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피하려고 했다. ‘ 그것들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어요. 그건 왜 읽어요? 책이 그런 걸 알려주지 않으면 도대체 뭘 알려주는데요?’(p383)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지금까지 살아왔던 방식에서 나는 많이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자유인이란 단지 제 몸에 긴 끈을 묶어 놓은 채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멀리 떠나 있으면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나 스스로를 가두어 놓은 틀인지도 모를 일이다.  조르바의 말대로 ‘산다는 것은……두목, 당신, 산다는 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오? 허리띠를 풀고 말썽거리를 만드는 게 바로 삶이오!’(p148) 삶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현재가 바로 삶이고 이 삶을 치열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죽음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죽음을 처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삶에 대해서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역시 인간이란 게 도대체 무엇이며, 왜 이 놈의 세상에 태어난지를 묻는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건 살아있다는 사실이란 것이다. 그는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라고 이야기한다.




   지은이 카찬차키스는 보이는 존재와 보이지 않는 존재,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 내재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 사색과 행동 등등의 영원히 모순되는 반대 개념에서 하나의 조화를 창출하려는 끊임없는 투쟁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았다고 한다. 그가 수 많은 국가를 여행하고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느낀 것들은 투쟁하듯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서 고통과 슬픔을 피하지 않고 파란이 끊이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속에서 흔히 정신의 고양이 높은 가치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높은 이상을 이야기하고 육체적 즐거움을 죄악시하면서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린 얼마나 이율배반의 얼굴을 보았던가. 추악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척하는 자들의 뻔뻔한 모습에서 우린 얼마나 절망하는가. 어떤 수도사의 고백에서처럼 여인을 품에 안고서야 신을 봤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의 육체는 영혼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 안에서 일체하는 것이다.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만났던 ‘조르바’라는 인물은 질그릇을 만들 때 물레를 돌리면서 거치적거리는 왼손 새끼손가락을 단박에 도끼로 쳐 잘라내거나 잠자리로 꾀는 여자를 거절하지 않으며 그것이 하느님의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에서 정당하게 한 번 했으나 실은 부정한 방식으로는 수 천 번이나 했다고 말하는 것에서 그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루하루를 닥치는 대로 살아가는 난봉꾼이 아니라 오늘 내 손에서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해도 현재를 받아들이고 그 자리에서 춤을 출 수 있는 초월적 정신을 가진 인간이라는 데 있다. 그가 지향했다는 궁극적인 가치 <메토이소노>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상대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라고 한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물리적 변화를 거쳐 포도주가 되는 화학적인 변화를 지나 사랑이 되고 <성체>과 되는 거룩한 상태가 된다는 것, 그토록 정성을 기울였던 사업이 한순간에 기울어졌음에도 춤으로 승화하는 조르바의 행위가 바로 메토이소노라는 것이다. 모든 것을 잃고도 잃은 것이 없는 것처럼 춤을 출 수 있는 행위,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밖에서 돌아오니 아내가 다른 사내와 한 방에서 정을 통하는 장면을 보고도 그 둘을 놔두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불렀던 처용처럼 그건 이미 삶의 한 경지를 이룬 이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늘 미망에 사로잡혀 갖지 못할 것을 추구하고 갖고 있는 것을 놓치 않으려고 하니 말이다.




   세상이 참 수선하다. 나의 우울은 수선스런 세상에서 비롯한다. 내 것인 적도 없고 내 것이기;를 바란 적도 없던 것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려 하고 가졌으며 그것으로 인해 거짓과 폭력과 기만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다. 나는 거리로 나가서 그들의 추악한 면을 소리치며 외친다. 내가 속한 세상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데 문득 그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싶다. 사람들은 세 가지의 부류가 있다고 하지 않는가.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도 세상을 이루는 한 부류 중 하나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끝난 순간. 마치 어렵고 어두운 필연의 미로 속에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행복하게 놀고 있는 걸 발견하고 자유의 여신과 노는 상태,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온다고 해도 부서지지 않는 상태, 외적으로는 참패했을지라도 내적으로는 승리자일 때 인간만이 말할 수 있는 긍지와 환희를 느낄(p415) 수 없다. 외적인 재앙이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은 가지지 못한 자들을 연민할지 모르나 모든 것을 털어내고 맨 손으로도 행복의 절정에 달한 사람들의 순간을 경험하지 못한다. 그들은 파리하게 영혼이 빠져나간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리라.




   나는 삶과 죽음이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삶의 선택을 받는 순간 이미 죽음이란 선택을 다른 한 손에 쥐고 태어난다. 이 세상에 죽음을 받아 지 않은 사람은 없다. 호방하게 현재를 살고 몸이 다 닳도록 지독한 노동을 했던 노동자 ‘조르바’를 통해서 삶의 현재가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이끄는게 바람직한지 돌아보게 된다. 작가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 새겨진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 나 역시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두렵지 않기 때문에 이 순간 죽음을 앞에 둔다 하더라도 자유로울 것 같다. 다만 인간이 너무나 애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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