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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Aug 06. 2022

'재와 빨강'을 읽고

책 읽는 우체통

   한국 사회는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그건 지금도 진행형이다. 헬조선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한국에서의 삶은 때로 구차하고 때로 비참하다. 가진 이에겐 너그럽지만 없는 이에겐 가혹한 곳이기도 하다. 변화와 활기가 넘치지만 보여지는 것에 열중하는 한국이란 나라에서 그 이면은 아프고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나의 조국 한국에 대해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은 ‘촛불시위’와 그 결과로 얻어진 대통령 하야와 새로운 정부의 출범이다. 우린 새로운 시작지점에서 다시 우리 삶을 돌아보고 행복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고민해 본다. 하지만 우리가 겪는 이 문제들은 우리 사회만이 겪는 문제는 아니다. 자본주의의 극단에서 4차 산업과 AI의 등장으로 인해 또 다시 소외되는 인간 문제들은 우리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우리가 앞으로도 생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시점에서 편혜영의 책은 삶을, 인간을 돌아보게 한다.

  책을 덮고 2부의 긴장감이 채 사라지기 전에 c국에서 전혀 새로운 이름으로 살게 된 한 사내의 삶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그의 새로운 삶을 시작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나, 하는 것이 주된 고민거리다. ‘새롭다’에는 희망과 긍정이 내포되고 있으나 책 속의 사내에게 새롭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잃은 구차한 삶을 이어나가는 ‘쥐’와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 싫을 뿐이다. 책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쥐와 방역과 몰의 이미지는 좀비들과 판옵티콘, 거대한 권력의 이미지와 병치되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보다 강화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1. 왜 쥐일까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도 않으며 그 균은 수십 년간 가구나 속옷 사이에서 참을성 있게 살아남아 아마도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쥐기 위해 또 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울 수도 있다.”/알베르 까뮈, 페스트 중에서

“쥐가 무슨 일로 시간을 쓰는지 알면 금세 이해될 것이다. 쥐는 무리를 생산해내는 일에 일생을 바친다. 그것이 쥐가 하는 유일하게 생산적인 일이다. …중략 쥐는 어떤 곳이라도 자신의 영토로 개척할 수 있다. 물론 개척은 암컷 한 마리만으로도 가능하다.”p112


알베르 까뮈의 <페스트>에서의 ‘쥐’는 대항해야 하는 대상, 인간이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었다. 쥐는 인간의 삶을 망가뜨리고 재앙으로 인해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에 중점을 두고 써진 이야기다. 반면 편혜영의 <재와 빨강>에서의 ‘쥐’는 인간 그 자체이다. 병균처럼 죽여도 죽여도 또 살아서 오로지 종족을 번식하는데 목적을 둔 존재처럼 보인다. 작중 인물 ‘그’가 c국으로 발령받았다는 이유가 다른 능력이 없음에도 쥐를 죽이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게 이유라는 지사장의 말은 유머처럼 들리지만 실제로 그가 전혀 다른 존재로 자신의 이름을 잃은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쥐인가. 몇 년 전부터 영화와 소설의 소재로 등장하는 좀비와 쥐는 많은 부분 비슷하다. 작가가 작품 속에서 쥐의 속성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좀비도 쥐도 본능에 충실한 존재다. 존재의 이유 따위가 없다. 그저 먹고 생존하는 것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교미하고 생산한다. 한 번에 많은 수의 개체를 잉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쥐는 인간보다 우위에 있다. 그래서 어디에든 쥐는 존재한다. 그리고 본능에 충실하게 자신의 할 일에 집중한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도 쥐와 다르지 않다. 생산적인 일을 한다지만 먹고 마시고 교미하고 생산하고 존재에 대해서 스스로 묻는 일을 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름에 대해서 존재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쥐가 무섭고 두려웠다. 처음에는 자신이 쥐와 같은 처지라는 게 무서웠고 나중에는 쥐를 잡을 때에만 쥐와 같은 처지가 아니라는 안도를 느끼게 되어 그 안도감 때문에 틈나는 대로 쥐를 잡으려고 하는 게 무서웠다.” - p228

나는 영화가 시작하는 내내 감염된 후 뇌는 죽고 몸만 살아 먹고 살겠다고 뇌가 살아있는 사람들을 공격하는 영화에서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현대인과 좀비가 뭐가 다를까 생각해본 적 있다. 인간은 어느 순간 쾌락과 욕망에 충실한 존재가 되어 생각하는 능력을 상실해가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소수의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 능력을 넘겨주고 좀비처럼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질문을 하곤 했다. 그것은 작중 인물이 자신에게 생긴 조급함을 마음에 드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급함이나 두려움은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생기는 것이라는 작중 인물의 진술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기대하는 미래는 무엇이었나 생각해보게 된다.


“그는 잠자코 어디서든 끝내 살아남을 쥐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p229

“본래 멸종에의 위협은 종을 강화시키는 법이다. 전염병은 사실상 인간이라는 종을 강화시키는데 일조한다. 쥐와 마찬가지로 인간도 쉽게 소탕되는 종이 아니다.”p117


우리에게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문제인가, 살아가는 게 중요한 문제일까. 소설 속의 ‘그’는 살아남는 쥐와 더불어 우리에게 그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2. 공간이 던지는 질문

우리는 어떤 문제에 직면했을 때 현재 삶의 공간을 다른 곳으로 옮기면 좀 더 낫지 않을까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에게 공간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아파트에 집착하고 맨션에 집착하는 것은 상승욕구다. 공간의 집착은 상승욕구의 표현이다. 소설 속에서 공간은 내가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c국으로 상정되었다. 변화의 공간이고 상승의 공간이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그에게 c국은 다르지 않다. 읽는 독자에게도 굳이 c국으로 입국한 그의 족적이 새롭지 않다. 소설 속에서 표현하는 c국의 이미지는 현재 나와 당신이 사는 곳과 다르지 않다. 지진이 일어나고 사투리어조가 묻어있는 그 나라 언어를 이야기하지만 독자에게 c국은 이국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다. 결국 우리가 삶의 공간을 옮겨 변화를 꾀한다 해도 사람이 바뀌지 않은 이상 똑같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과는 상관없이 빌딩숲을 걷고 점심 먹을 걸 걱정하고 타인의 죽음을 일상으로 받아들인다. 그 죽음이 개죽음이 됐든 병사가 됐든 상관하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죽기 마련이니까. 매일 교통사고로 죽고 병으로 죽고 노환으로 죽는 숫자가 전염병으로 죽는 숫자보다 더 많은데 무슨 상관이랴.

“하지만 평상시의 사망률과 별로 다루지 않아요. 심각한 게 아니라는 거죠. 전염병 때문에 죽기도 하지만 여전히 암이나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더 많아요. 물론 늙어서 죽는 사람이 가장 많지요.”p210


그리고 ‘그’라는 개별적인 준재조차 모국에서 전처를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한 것처럼 쥐를 잡으려고 방문했던 집의 여자 주인을 살해하는 장면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모국에서 그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고 c국에서의 그도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다. 정확히 박멸을 목표로(절대로 그럴 수 없지만) 일하는 다국적 세균퇴치 회사지만 결국 쥐나 잡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방식은 다르지 않다. 오히려 그는 c국에서 자신의 이름을 잃었을 뿐이다. 모국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했다면 c국에서의 그는 자신으로 c국으로 오게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몰’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다. 정체를 잃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잃는 것이다. 그는 모국의 자신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는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과 행적을 알지 못한다. 그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를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고 정체 없이 살아가게 된 이유는 크지 않다. 그가 생각한대로 한 마리 쥐가 그의 일생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다.


“그는 더럽고 볼품없는 쥐 한 마리가 우연히 이끈 삶의 궤적을 언제든 떠올릴 수 있었다. 지금 잡는 한 마리의 쥐는 그를 다시 낯선 인생으로 내몰지도 몰랐다.”p207

“그의 불행은 이처럼 사소하고 미세한 생활을 결을 다시 매만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망이 그를 짓눌렀다.”p169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오로지 과거의 시간이었다. 현재는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미래는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방대해서 멀고도 멀었다. 어차피 그가 미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것이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이라는 것 뿐이었다. 석유처럼 검은 하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이 언제나 제 할 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시간은 진창 속에 빠져 있기도 하고 오물과 섞이느라 더디 흐르기도 한다. 그러니 미래는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p167


미래라는 시간은 공간과 더불어 인간에게 희망적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진정한 미래의 희망이 있는가는 의문 부호로 남는다. 소설을 덮으면서도 씁쓸한 건 그래서이다.


3. 재와 빨강

소설을 읽는 내내 왜 ‘재와 빨강’일까 생각했다. 그러다 소설을 읽으며 한 줄의 진술을 통해 제목이 어디서 왔을지 알 것 같았다.


“소각장에 쓰레기를 버리기에 가장 좋은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었다.”p229


현실은 사소하고 비루하기만 할 때가 많다. 그걸 참아내느라 우린 더 고통스럽고 외롭다.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사회로부터 격리당하는 감정에 휘말릴 때도 많다. 평범한 사람일수록(자신이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더 많이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 불만은 더욱 쌓이게 마련이다. 쥐처럼 생존의 본능만 살아남은 사람들 틈에서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살아있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더 큰 해를 끼치는 경우가 많다. 죽은 사람은 더럽고 불결한 세균덩어리에 불과하지만.(p177) 또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모든 재료들이 섞여 어떤 재료들이 실제로 짓물러 썩어가며 나의 영역까지 파고 들어와 썩어가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p226) 그럼에도 우린 살아야 하는 과제를 받고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숙명이다. 소각장에서 인간의 육체는 생각보다 오래 탄다. 그토록 중요했던 존재였던가. 그가 생각했던 자신은 어디에 갔는가. 공중전화 박스에서 찾았던 그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가. 쥐를 잡듯이 전처를 죽이고 생존을 위해 여자를 죽은 그의 손에 묻은 붉은 색은 살면서 살아질까. 살아지는 것은 무엇일까. 허전하기만 하다. 생존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묻는다. 살아가는 것일까. 살아지는 것일까.


“쓰레기는 다른 날보다 오래 탔다. 잔분은 오랫동안 남아 밤을 밝혔고 영혼처럼 가벼운 재가 밤새도록 공원을 떠돌아다녔다.”p151


이 책을 읽는 동안 시리 허스트베트라는 미국의 여류작가 하나를 알게 되었다. 인상적이었다. 그녀의 말이. 그녀의 말을 끝으로 글을 마친다.


글을 쓰는 행위는 고독할 수 있지만 그것은 항상 다른 사람을 향해 나아간다. 단 한 명의 다른 사람. 모든 책의 혼자 읽기 때문이다. 종이 위에 새겨진 모든 문장은 접촉을 위한 시도, 이해받고자 하는 희망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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