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우체통
“ 제가 이해하는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랍니다.” p237
스마트폰 속에서 시리가 말하는 이 문장은 절묘하다. 기계가 인간의 삶을 너무나도 적절한 말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내가 이해하는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삶이란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 이처럼 아름다운 말이 또 있을까. 고통의 연속이 삶이란 말도 너무나 잔인하고 진부하기까지 하고 반면 아름답다고 말한다면 사기 같다고나 할까.
이 소설 속에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 소설 속에 등장하는 단락이 아닐까 싶다.
“ 어쩌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선 ’삶‘이 ’죽음‘에 뛰어든 게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게 아니었을까. 당신을 보낸 뒤 처음 드는 생각이었다. p266
7편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바깥은 여름>이란 제목은 <풍경은 쓸모>라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유리 볼에서 따왔다. 유리 볼 속의 겨울과 유리 볼 밖의 여름 풍경에서 나온 이 제목은 7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겪는 심적인 계절과 실제와의 괴리 사이를 가장 적절하게 표현한 상징적인 단어라고 생각한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사랑하는 사람들, 가까운 사람들과 이별을 하고 있다. 그 이별은 애초에 물리적, 육체적 이별이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감정적인 이별까지 가닿게 된다. 그 안에서 우린 작품 속의 인물들이 겪는 슬픔을 고스란히 느끼고 그 슬픔 속에서 그것이 또 다른 삶의 시작이고 또 다른 아름다움이라는 것에 공감하게 된다.
어머니와 헤어지고 그 이별에서 헤어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젊은 나이에 엄마와 이별을 했기 때문은 아니다. 나도 이미 엄마가 되었으니 그 말도 무색해졌다. 그럼에도 이별은 쉽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다. 아마도 내 아이가 나와 헤어지게 될 때도 나는 그 이별을 어려워 할지 모르겠다. 소설 속의 여러 형태의 이별 역시 슬프다. 소설책을 덮을 즈음 가슴으로 무겁게 내려앉는 것은 익숙해지지 않는 슬픔 때문일 것이다.
소설은 모두 깔끔하다. 잘 다듬은 문장과 내용들이 우리 일상성 속의 이별과 슬픔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입동>은 어렵게 마련한 집에서 아이가 유치원에 가고 학교에 들어가며 더 이상 이사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기뻐하는 부부가 그 아이를 잃은 다음의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빚을 내 얻은 집에 소액을 들여서 정성스레 가꿔 자신만의 공간으로 완성되어 갈 무렵 빚을 갚고도 남을 보상금을 남기고 아이가 세상을 떠나지만 부부는 그 돈을 쓰지도 못하고 그 집을 떠나지도 못한다. 집을 팔려고 해도 집값은 떨어져 있고 집을 사려고 나서는 사람도 없다. 결국 아이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마음에 얼룩이 진 것처럼 부엌 벽에 얼룩을 없애기 위해 새로이 도배를 하며 그들은 죽은 아이가 남긴 흔적을 발견한다. 자신의 이름을 적다 만 흔적, 부부는 그 흔적을 보고 흐느껴 운다. 아이가 죽고 우는 것조차 서로 눈치를 보며 제대로 울었을까 싶은 긴장의 상태가 소설 말무리에 확 풀리게 된다. 그 순간 독자는 이들 부부가 슬픔은 슬픔대로 가슴에 묻고 다시 시작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원래 그런 것이 아닐까. 작가의 말처럼 삶이란 결국 삶에 뛰어들면서 계속되는 것이니까.
책 한 권에 편재되어 있는 다른 여섯 편의 소설도 첫 번째 소설과 다르지 않다. <노찬성과 에반>은 길에서 주운 에반을 떠나보내는 찬성이란 아이의 성장을 다룬다. 죽어가는 에반에게 안락사를 시키기 위해 힘겨운 알바까지 했지만 삶의 유혹 때문에 알바로 번 돈을 조금씩 소비하는 동안 스스로 차에 뛰어든 에반의 주검을 찬성을 외면한다. 이미 찬성은 에반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고통스럽지 않게 세상과 이별시켜주고 싶었던 찬성의 마음 빈 구석으로 들어서는 산 사람들의 욕망은 우리의 삶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욕망이 결국 죽음과 이별하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하지 않은가. 그런 것이 삶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건너편>은 동거한 남자와의 이별을 꿈꾸지만 자꾸만 미뤄지는 상태에서 결국 이별을 정당화시킬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며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던 진짜 마음을 알게 되는 도화의 마음이 잘 그려져 있다. 그런데 실제로 이렇게 헤어질 빌미를 만들어주는 애인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헤어질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데 정말로 헤어져야만 할 애인은 없을까. 헤어질 이유가 분명한데도 헤어지지 못하는 무수한 연인들은 없을까. 잘 헤어지는 법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게 된다.
<침묵의 미래> 역시 사라지는 언어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제주에서 쓰는 제주 방언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언어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현재 전 세계에서 6800여 개의 언어가 존재하고 그 언어 중 절반 이상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고 한다. 그토록 많은 언어가 있다는 사실도 놀랍거니와 그 언어 중 절반 이상이 곧 사라질 거라는 것, 또 그 언어 중 우리의 제주 방언도 소멸 언어중 하나라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사라지는 언어에 대해서 그리고 그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남아있는 침묵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사실 작가의 생각처럼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 침묵이 자리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 힘이 센 언어가 사라진 언어를 대신할 것이고 소수가 쓰는 언어는 그런 식으로 점차 사라져서 다수가 사용하는 언어만이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힘을 가진 자들이 힘이 없는 자들을 지배하고 폭력으로 제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언어를 통해 벌어지는 세상의 뒤틀린 욕망과 폭력에 대해서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이별하는 언어가 갖고 있는 아름다운 속성들.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
<풍경의 쓸모>는 풍경과 주경이 되는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서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 어머니와 타자와의 관계, 나와 곽 교수와의 관계 등등 주경과 풍경이 되는 인간관계의 아이러니를 다루고 있다. 아마도 우린 일상에서 풍경이 될 때도 있고 주경이 될 때도 있을 것이다. 자존을 지키는 건 주경이 될 때만은 아니다. 결국 삶의 진정성이란 건 자신밖에 모르는 것이고 주경이 된다고 해서 자존을 지키는 것은 아니리라. 그럼에도 소설 속의 화자의 쓸쓸함이라니. 현실 속에서 풍경이 되는 것은 역시나 슬픈 일이다.
<가리는 손>은 혼혈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엄마가 폭력 사건에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목격자로서 아이들의 동영상에 등장하는 자신의 아이의 모습의 실체를 외면하다가 그 실체가 다가감으로써 느끼는 절망과 공포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것도 아이의 생일상을 차리면서 애써 감추고자 하는 진실이 어쩌면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은 진실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다. 문장이 조금씩 버그러지는 부분들이 눈에 거슬리게 하지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작가의 힘이 느껴지는 부분이 많은 소설이기도 했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화자가 남편을 잃고 사촌의 배려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보낸 며칠간에 심리적 병인으로 몸에 드러나는 증후와 그곳에서 남편과의 실질적인 이별을 해가는 과정을 슬픈 서술로 적어 내려간 소설이다. 이 소설은 내게 스코틀랜드의 추억을 불러내주었다. 로얄 마일 거리와 세인트 자이스 성당 등 익숙한 거리와 건물들이 내게 그 거리에서 혼자 느꼈던 감정까지 불러와 소설 속 화자의 황폐한 슬픔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이별이 감각화되면서 몸에 드러나는 반점과 어둑해지는 흔적들, 그리고 비늘 등은 감정의 찌꺼기에서 화자가 점점 벗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주기도 한다. 결국 모든 이별은 아픔과 슬픔이 동반하지만 남는 자의 몫은 그것만을 끌어안고 살 수는 없다. 그래도 결국 삶은 계속되는 것이니까.
소설을 덮으며 가슴으로 빠져나가는 헛헛한 기운을 그대로 두었다. 어쩌면 삶이란 건 그런 게 아닐까. 이별과 만남이 교차하면서 감정도 그런 것이 아닐까. 내가 이별하는 것들과 나를 이별할 것들. 내가 보내는 사람들과 나를 보낼 사람들. 시간과 추억은 씨줄과 날줄로 그렇게 짜여져 우리의 삶을 완성해 가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것을 우리는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시리의 말처럼 삶이란 게 슬픔과 아름다움 사이의 모든 것이지 않은가. 참 멋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