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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Jul 25. 2022

'생의 수레바퀴'를 읽고

책 읽는 우체통

선택은 신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이다바로 성장하는 자유사랑하는 자유이다.p183



살면서 내가 했던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을 꼽는다면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이 편해지도록 도와드렸던 일이다. 나는 부모님과의 이별을 겪으면서 삶의 끝에 직면한 사람들은 그것(죽음)을 인지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험은 어떤 이론보다 주관적이지만 직접적이다. 경험을 말하기엔 그래서 조심스러운 점도 있지만 경험처럼 솔직하고 분명한 것도 없다. 다만 그것이 보편적 경험일 때 설득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영적 교감에 대해서는 아주 조심스러운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수레바퀴’라는 말을 찾아보니 수레바퀴처럼 쉬지 않고 달려가는 인생행로를 일컫는 비유적 표현으로서 성경사전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이미 종교계에서 쓰고 있는 이 단어가 내게는 익숙한 표현으로 들렸던 것은 헤르만 헷세의 자전적 소설이었던 ‘수레바퀴 아래서’란 책 제목 때문이었던 것 같다.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아버지의 욕망과 선생의 지시대로 우수한 성적으로 신학교에 입학한 한스는 시인의 꿈을 접고 적응하려고 해도 결국은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돌아와 시계공이 되었다가 결국 물에 빠진 시체가 되어 발견된다. 자살한 것으로 추측되지만 사고사였는지 자살인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소설에서의 수레란 꿈, 사랑, 기쁨뿐이 아니라 권위, 제도, 명예, 욕망 등도 함께 담겨 있다. 수레를 끄는 삶의 주인공인 나에게 필요한 것은 진실한 관계와 자신의 삶에 대한 스스로의 선택이다. 한스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의지에 굴복하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려는 용기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죽음에 직면한 것인지 모른다. 결국 삶의 수레바퀴에 치여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전 생애에 걸친 숙제이다. 그런 점에서 세쌍둥이 중 하나로 태어나 스스로의 삶에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개척했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자기 삶의 수레바퀴를 잘 운전했던 분이었다. 사실 그녀처럼 자신의 일생을 주도적으로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의지보다는 삶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는대로 이끌려가다 어느 순간 그 무게에 짓눌려 바퀴에 깔려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처럼. 흔히 우리는 우리의 욕구와 꿈을 주변과 자신의 의지박약으로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결과를 두고서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외부와 타인에게 전가하는 경우가 많다.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신이 내려준다는, 말은 자칫 고통 속에 있는 사람에게 잔인하게 들릴 수 있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떠한 고통이라도 그 고통 속에서 진지한 삶의 진리를 직면하는 그녀의 태도야말로 고통에 직면해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것이 크다. 나 역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성장하는 나를 발견하는 기쁨을 겪었기에 저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큰 울림을 주었다.


 

 

삶은 현재에 있다

 

살다보면 신과 마주하는 순간순간들이 있다. 기쁨의 순간보다는 고통과 슬픔의 시간이 그러하다. 그럴 때 우리는 신을 향해서 오열하며 신을 부정한다. 그러나 그 시간은 흐르게 마련이고 결국 내가 그것을 극복하든 안하든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 한 어느새 나는 신의 질문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이 온다. 현재는 곧 과거가 되고 미래를 현재로 맞이하게 된다.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신은 항상 그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신다(p127)는 말은 참으로 고약한 말이기도 하다. 고통을 통해서 성장을 가져오고 얻고 싶은 것을 취득하게 하는 신의 섭리야말로 얼마나 잔인한가. 그럼에도 그 잔인한 순간을 이겨내고 거울 앞에서 선 나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 그만큼 성장한 모습에서 또 다른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것은 그렇게 지나가게 되어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죽음은 나 자신의 죽음은 물론이고 타인, 그것도 나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의 죽음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우리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말은 다만 죽는 순간까지 지금처럼, 지금까지처럼 살라는 말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어리석게 살았다면 자신을 조금 내려놓고 하고 싶은 대로 살라는 말을 해준다. 끝이 보이는데 굳이 원칙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을 전해주는 것이다. 거기에 답이 있다. 결국 삶은 현재 나의 의지대로 타인의 시선과 상관없이 순간순간이 내 선택의 문제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죽음의 순간에 인지한다는 것이 슬플 뿐이다. 언젠가 호주의 여성이 죽어가며 죽기 전에 해야할 일들에 대해 적은 글을 인터넷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 책 속의 저자의 말과 다르지 않다. 죽어가는 환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때 우리는 나의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다.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대해서. 그것은 결국 어떻게 살았는지에 따라 죽음도 다르다는 말의 역설일 것이다. 삶의 한 과정에 죽음이 놓여있고 죽음이 삶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죽음의 순간이 두렵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이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고 늘 느끼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경험일 것이다. 나 역시 부모님의 죽음을 가까이서 지켜보면서 그리고 그분들이 편안히 숨을 거두시게 도움의 말을 전해드리면서 죽음을 좀 더 편안하게 맞이할 수 있는 건 삶에서의 집착을 벗어던지면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부터이다. 죽음을 지켜보는 것은 지나온 나의 삶을 돌이켜보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벗어내지 못하는 것들이 많다. 삶의 갈피마다 매번 집착으로 점철되었으니 죽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죽음을 멀리하는 건 삶에의 회환이 많아서일까.


죽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식스센스,라는 영화를 보면 죽은 영혼을 보는 소년이 나온다. 그리고 그 소년의 정신감정을 하는 의사가 소년과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영화의 마지막 반전은 소년과 대화를 나눴던 정신과 의사가 실은 죽은 영혼이었다는 사실이다. 영혼은 여전히 현재에 머물러 소년의 주변을 맴돌며 하고 싶었던 말을 소년에게 전달하려던 것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년이 의사에게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서 주저하다 진실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은 죽은 의사의 영혼이 자신이 갑자기 죽으면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소년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영혼은 여전히 세상에 머물면서 아내에게 집착하고 있다. 삶과 죽음이 한 공간에 있었던 영화에서 나는 영혼이 삶의 순간에 겪었던 집착들을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했었다. 책 속에서 보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다섯 가지의 단계, 부정과 고립,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살아가는 동안 많은 부분을 내려놓지 못하고 살면서 실패와 절망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의 과정과 같다. 사는 동안 고통과 실패와 절망의 시기를 쉽게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서 성장을 했던 사람은 결국 죽음의 순간에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좀 더 쉬울 것이다. 평생을 통해서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 놓여있고 많은 부분 절망 속으로 빠트리는 것들은 그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내가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거나 상대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느끼는 감정은 죽음의 순간에 최고조가 된다. 내가 수용되지 않은 나의 죽음을 이미 타인이 기정사실화했을 때의 슬픔에서부터 내가 세상과의 관계를 털어버리고 훌훌 떠나려고 해도 나를 붙잡고 나와의 관계에 집착하는 타자와의 관계에까지, 결국 죽음은 삶의 또 다른 모습으로 그간의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여준다. ‘좋은 삶을 살아가려면, 그래서 좋은 죽음을 맞이하려는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목표를 선택하라고 나는 말한다. 바로 성장하는 자유, 사랑하는 자유이다.... 어떤 삶은 사느냐는 결국 각자가 선택한다’(p183)


언제부턴지 나는 죽음 이후에 대해서, 우리 영혼에 대해서, 에너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물질로 이뤄진 우리 육체와 마음 혹은 두뇌의 작용으로 움직이는 생각이란 것들이 삶을 통해 하나로 움직였다면 죽음 이후에도 육체의 죽음과 마음의 죽음이 동시에 올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물질로 이뤄진 우리 육체를 움직이게 하는 에너지는 죽음을 통해서 과연 사라지는가. 영들과 채널링을 통해서 만나고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저자가 말한 것들이 내게 쉽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영화 ‘식스센스’의 소년과 같은 능력을 타고나지 않은 나로서는 저자의 경험은 초자연적 현상의 일부로 느껴질뿐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건 내가 스스로에게 물었던 질문들 때문이었다. 나 역시 죽음이 끝이 아니고 우리의 삶은(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육체 속에 있는 ‘나’라는 존재, 육체와 분리된 본질적인 나)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닐까,하는 질문이다.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나의 죽음을 당면했을 때 경험하게 되지 않을까.


오늘 하루 자신을 사랑했는가

 

책을 관통하는 저자의 이야기는 평생을 통해 하고자 하는 의지, 타인의 강요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에 따라 살아왔던 저자의 의지와 삶이 가져온 수많은 경험과 결과의 산물을 통해 얻어진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가 아버지의 의지에 반하여, 여성이라는 현실적 벽에 반하여, 이방인이라는 환경에 반하여, 유산과 이혼이라는 삶의 고통에 반하여 스스로 선택한 삶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이겨왔던 삶의 처절한 결과물 앞에서 그녀가 얻은 진실에 대한 이야기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자신의 주변에 있었던 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사랑했기에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우리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그녀가 겪었던 경험을 통해 얻어진 진실에 대해서 고백하게 되었을 것이다.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사람은 가장 진실하게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녀가 임사체험과 같은 경험을 통해 처음으로 내뱉은 말 ‘산티 닐라야’라는 말이 ‘최후의 평화의 집’이란 뜻인 것처럼 죽음의 순간에 직면한 사람이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녀가 우리에게 현재를, 삶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살라고 말하기 전에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해 그녀가 살았던 방식 자체가 하루하루에 충실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봉사하며 살았던 흔적만으로도 그녀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충분히 말하고 있다. 그녀는 죽음은 나비가 고치에서 벗어나 훨훨 날아가는 것처럼 더 높은 경지로 오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런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현재를 잘 살 것을 권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하는 성장의 과정을 보내라고 말한다. ‘죽음의 기술’의 저자 피터 펜윅 박사 역시 “훌륭한 죽음”을 방해하는 것은 미처 마무리 짓지 못한 일이며 그 일을 해결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화해이며 평화로운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한다면 타인을 용서하고 타인에게 용서를 구하고 무엇보다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할 것을 말한다.


죽음을 부정하고 죽음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된다면 삶에 대해서,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그만큼 진실하지 못할 것이다. 매일이, 일상이,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지 않았던 혜택을 받았던 우리에게 삶의 치열함을 통해 죽음이라는 삶의 연장선에서 진실을 직면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당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제 죽음은 현재이며 삶과 함께 있다. 노년은 길지만 죽음의 공포 역시 늘 우리와 함께 있다.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린 죽음에 대해서 아니, 삶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한 고민을 할 필요가 있다. 나만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공존하기 위해서 나의 희생과 배려를 공부하고 고민해 볼 때이다. 그것이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며 나의 죽음을 평화롭게 할 것이고 ‘최우의 마지막 평화의 집’에 머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이 아니고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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