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가 말했다. "내가 선택한다면 쟤를 선택할 거야." 나를 빈 교실로 부른 K의 뜬금없는 선포였다. 사실 뜬근없는 말은 아니었다. 이미 K의 마음은 알고 있었고 그걸 굳이 확인사실하듯 내게 말할 필요가 없었을 뿐이었다. 전학을 온 나와 짝인 된 K는 키가 큰 공부를 잘 하는 친구였다. K는 그림을 잘 그렸다. 아니,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차분한 성격에 공부도 체육도 미술도 잘 한 거로 기억한다. 그렇지만 K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지나치게 신중하고 조용했고 어려운 집안 때문인지, 위로 언니오빠의 영향 때문인지 어른 같은 걸 뛰어넘어 소녀와 같은 감상을 지닌 또래라기 보다는 우울함이 깃든 어른 같았다. 나 역시 전학으로 적응이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어 K와 금세 친해졌다. 학년이 바뀌고 K는 다른 친구가 생겼고 나는 섭섭했다. 어쩌면 나는 그 마음을 K에게 적극적으로 표현했는지 모른다. 그새로 내게 K의 답은 새로운 친구를 선택하겠다는 선포였다. 나는 상처받았고 우리는 그렇게 멀어졌다.
대학을 가서 K와 나는 다시 만났다. 1학년 1학기가 끝나고 K는 도망자가 되었다. 운동권 학생이었던 K는 수배자가 되었고 우리 집에서 며칠 숨어 있다가 내가 주는 몇 천 원의 돈을 용돈으로 가져갔다. 몇 년간 그 일은 반복되었다. 어떤 해엔 부족한 등록금을 나의 아버지가 융통해 준 적도 있었다. 공부를 잘 했던, 한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에 들어간 K를 나의 부모님은 내 좋은 친구로 남아있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K는 내가 필요하면 나타났고 도망다니는 동안 내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그에겐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친구들이 있었고 나는 필요할 때만 찾는 친구가 된 것 같았다. 그 필요한 순간이 경제적인 것이라 생각했을 때 나는 K에게 두번째 상처를 받았다. K와 다시 멀어졌고 결혼을 한 다음 우연히 K의 전화를 받았다. 다른 동창을 통해 내 전화번호를 알게 된 K가 소식을 전한 것이었다. 나는 K의 전화를 무덤덤하게 받았고 그녀의 전화번호를 적어놓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사는 세계와 내가 사는 세계에 금이 그어졌다.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없다라는 말로 단정지을 수 있을까. 요즘에 와서야 나는 툭하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로 내가 분노가 많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common sense라는, 상식이 얼마나 빈틈이 많은지,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생각들이 얼마나 폭이 넓은지 알게 되었다. 또 타인의 시선에서 나 역시 상식적인 사람의 범주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을 때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상식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얼마나 분명한 선이 그어지는지 세월이 쌓여가면서 점점 분명해졌다. 내가 그랬으니까. 사람들이 내가 고지식한 면이 많다고 했을 때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잘 참고, 잘 견뎌내는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 선을 긋고 벽을 치고 상식이란 선을 넘는 사람을 쉽게 내 영역에서 밀어냈다. 잘 참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멀어진 관계들이 많았다. 그리고 대부분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윤여정이란 배우의 '친한 사람과 싸우고 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을 했다는 짧은 영상을 봤다.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졌다. 정말 놓치기 싫었던 사람들과 끊어져 이젠 어떻게 사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 관계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녀의 말처럼 오랫동안 쌓은 정과 추억이 가득한 사람과는 끊어지고 새로 맺어진 관계로 추억을 만들고 좋은 관계가 되었다가 다시 실망하고 멀어지고를 반복하면서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J는 많은 관계를 엄지 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그 사이에 보이지 않는 관계의 끈을 잡고 지낸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쩌면 나도 그 관계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다시 섭섭해졌다. 그녀에게 내가 쏟은 정성과 시간이 무시되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화를 내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 J와 나와의 오랜 관계를 보아왔던 사람이 내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걸 지적했다. 내가 얼마나 보이지 않는 선을 긋고 내가 들인 정성을 타인에게 가끔씩 강요하는지. 그제야 관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J의 말이 맞는지 몰랐다. 지나치게 정성을 들인 관계는 본전 생각나게 한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는 그런 적이 없다고 단언코 말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J의 말처럼 엄지 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둥글게 말아 끝만 쥐고 있었다면 기대도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쓸데없이 쏟아낸 마음들이 없어서 섭섭함도 없었고 멀어지는 것도 없었을지도.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건 아니지, 라고 부정하고 싶은 마음 속의 소리들로 속이 와글거렸다.
관계를 이해할 때 가장 쉬운 건 상대를 비난하거나 나의 잘못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하지만 요즘 그런 생각이 든다. 정말 상대가 잘못하거나 내 잘못일까. 우리는 상대와 분쟁을 겪을 때 격렬한 감정의 상태에서 내뱉은 말이나 행동 때문에 상대를 비난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거나 한 가지 태도를 선택한다. 어쩌면 둘 다의 잘못일 수도 둘 다 잘못이 없을 수도 있다. 감정이 작용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상황이 있을 테니까. 관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데 우린 '사람'이라는 '나'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사랑의 이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서글픔과 함께 밀려드는 보이지 않는 선과 선, 관계와 관계들 사이에 있는 계단과 계급들과 넘지 못하는 마음들을 보게 된다.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면서도, 같은 지하철에 탑승했으면서도, 같은 레스토랑이란 공간에 있으면서도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선과 넘지 못하는 선이 있는지. 게다가 마음에까지 선이 있고 벽이 있으니 삶이 얼마나 팍팍하고 힘겹고 어려운지. 그런 것들을 너무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내가 이해라는 것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아닌가. 힘겨울 때마다 나를 돌아보기도 했고 멀어지는 관계들 때문에 멀어진 사람들과 나를 자책했지만 근본적으로 나에 대한 무덤덤하게 넘어가는 아량이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클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무심함과 아량도 더불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J의 말처럼 인연의 끈만을 잡고 있다면, 관계들로부터 상처받는 일은 없을까. 나는 오늘도 답 없는 질문의 꼬리를 붙잡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파문의 한 지점, 나, 라는 존재에서부터 모든 것은 시작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