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우체통
어렸을 때는 역사가 재미없는 과목이었다. 책으로 읽는 역사는 따분하다. 게다가 학교 다니면서 역사를 시험보고 등급을 매겼으니 재미있을 턱이 없다. 그런데 어른이 되어 영화를 통해서 뉴스를 통해서 다큐멘터리를 통해서 스스로 선택해서 새롭게 발견된 사실을 알게 된 역사는 재미있었다. 며칠 전에는 '뮌헨, 전쟁의 문턱에서'라는 영화를 봤다. 아마도 세계사 시간에 배웠을지도 모를 내용이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있지 않는 역사적 사실은 손에 땀을 쥐는 긴장감을 준다. 역사가 어느 드라마보다 재미있는 건 이미 지나간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뮌헨 협정은 영국의 체임벌린 수상과 프랑스의 달라디에,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그리고 히틀러가 배석한 자리에서 주데텐만이 아닌 북동부 일대의 땅까지 체코가 주권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긴 협약이다. 물론 이 협정으로 전쟁은 일 년 뒤로 미뤄지고 그 사이 영국과 프랑스와 유럽은 전쟁을 대비할 수 있었다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그들이 이 협약을 한 이유인 그토록 원하는 '피할 수 있는 전쟁'의 결과는 가져오지 못했다. 결국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히틀러는 미치광이와도 같은 전쟁놀음으로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유럽의 많은 부분이 파괴되었다. 영화는 당시의 상황과 이 협정을 막으려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 속에서 이 바보같은 협정을 맺은 체임벌린은 전쟁의 발발 후 많은 사람들의 비판으로 수상 자리에서 물러난 몇 년 후에 사망했다고 한다. 영화는 낭만적인 생각의 위험성, 이미 벌어졌던 일이 재연될까 봐 전전긍긍했을 때 벌어질 일, 소수의 목소리라도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 그리고 어느 위기에서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경이감,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역사를 배울 때 매번 듣는 말이 있다. 역사를 통해 반복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지 매번 같은 역사를 반복하는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처럼 쉽게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또 좋은 친구를 두면 내게 좋은 일이 생긴다는 걸 알면서도 나쁜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나쁜 연인이 삶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쉽게 나쁜 연인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것처럼. 인간이 나약하고 오류가 있음은 관계 맺을 때 드러나고 그건 우리 역사를 통해서도 여실히 보여준다. 투표를 통해서 지도자를 뽑는 기회를 얻었을 때 다수의 현명한 판단이 현명한 지도자를 뽑을 거 같지만 결과는 다수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어리석고 무모한 지도자를 뽑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늘 좋은 지도자만을 뽑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대중의 마음 속으로 들어온 지도자는 권모술수와 현란한 말로 환심을 사고 마법과 같은 최면의 시간을 선사하고 그 사이에 나쁜 지도자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나라와 세계를 위험에 빠뜨린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런 지도자의 위험성을 알면서도 국민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한 표를 또 다시 그런 지도자에게 던진다. 스스로의 목숨을 벼랑 끝에 몰고가게 하는 것도 모르고. 아마도 독일 사람들이 스스로의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을 때는 전쟁의 광풍에서 죽은 자가 산 자보다 더 많은 걸 인식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소수의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이 발견하고 정치하고 경제를 꾸려나간다. 그리고 그들에게 권력을 던져주는 건 다수의 국민들이다. 인간이 불완전하기에 텅 빈 영혼의 인물에게, 광기에 찬 인물에게, 능력이 부족한 인물에게, 세상을 낭만적으로만 생각하는 인물에게, 경제적 권력을 정치적 권력으로 확장시키려는 인물에게, 싸이코패스에게, 소시오패스에게 투표권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반성하고 과오를 바로잡으려 한다. 죽음의 위험을 무렵쓰고라도. 그래서 인간의 역사가 유지되는 것 같기도 하다. 삼년 간의 비현실적 상황이 끝나가고 있다. 다시 세계는 전쟁의 위험에 놓여 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의 이유와 비슷하다) 일이 벌어졌다. 돈바스의 친러 세력 때문에 그 땅의 독립을 요구하며. 역사는 반복된다. 전쟁에 직접적인 개입을 피하려는 이유는 과거의 교훈 때문이리라.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고, 경제상황이 점점 나빠지고(스페인 독감 후 세계 공황은 전쟁의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미치광이들이 지도자가 된 세상에서 또 이전과 같은 비극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그때와 다른 건 '핵'이라는 무시무시한 무기가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는 그 정도의 무기가 없었으니까. 다시 한 번 인간은 어리석기도 하지만 지혜롭고 훌륭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 역사는 비극을 딛고 다시 일어선 인간의 모습을 보여줬으니 지금의 위기도 이겨낼 것임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