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파치노는 83살이 되어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아기 엄마는 20대이다. 증손자라고 해도 될만한 여성에게 자손을 본 그는 자신도 믿기지 않는지 친자확인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이의 아빠임을 확인했다. 노인의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 노인의 육욕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아이와 엄마를 살뜰하게 챙겨주고 죽을 때까지 그들과의 삶을 꿈 꾼다면 노인의 사랑이란 근사한 결말을 볼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알 파치노는 명성에 흠집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긴 만남과 헤어짐이 감정과 상관 없이 이뤄지는 헐리우드에서 사랑을 꿈 꾸는 게 나의 순진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여인의 향기'에서 보여준 우수에 찬 노인의 아름다움에서 아직도 사랑의 감정이 꿈틀대는 순수를 기대해 본다. 슬픈 짐승은 이미 오래 전에 사라졌을지도, 아니 여전히 계속되고 있을지도 모를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본인의 진술로 끝까지 이어지는 기억들은 현실의 기억인지 죽은 이의 회상인지 모를 진술로 이루어져 있다.
'슬픈 짐승'을 쓴 모니카 마론은 1941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뉘른베르크협정으로 유대인과 독일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이 발효되고 유대인이었던 친아버지는 어머니를 떠난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모니카 마론은 동독윽 내무장관이었던 양아버지로 인해 동베를린으로 이주해 거주하게 된다. 훔볼트 대학을 나온 그녀는 소설 속에 나오는 낱말 '기이한 시대'라는 말처럼 전쟁과 분단, 그리고 장벽의 붕괴 등을 겪으며 구동독을 비판하기도 했고 분단 독일에서 사는 독일인들의 슬픔을 쓰기도 했다. 소설 속에 등장했다시피 어린 시절 배웠던 스탈린을 찬양하는 노래를 사랑하는 프란츠 앞에서 불렀을 때의 프란츠의 태도에서 느끼는 자괴감, 그 시기에 살았던 구 동독의 사람들의 모습은 그로테스크하다.
톱합된 베를린의 자연사박물관이 직장이었던 화자는 어느날 브라키우사우르스 앞에서 넋을 놓고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마음을 흔드는 남자 프란츠가 '아름다운 동물이군요'로 한 마디로 그녀는 그와 사랑에 빠진다. 동독의 여자와 서독의 남자가 만나 기이한 시대의 사랑을 시작한 그들에겐 각각 가정이 있다.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처럼 나는 아내를 떠나지 못하는 프란츠에게 집착하고 그녀의 짐작대로 프란츠는 어느날부터 그녀에게 오지 않는다. 그녀의 시계는 그대로 멈춘 듯, 세상과 단절되다시피 시간을 보내는 그녀는 프란츠와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일생을 채워나가고 있는 셈이다.
기억한다는 것은 잊지 않는다는 것과는 조금도 관계가 없다. 신과 세상을 브라키우사우르스는 잊었다. p15
나는 인생에서 우리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는 생각과 타협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모습인지도 알지 못한다.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을 알고 있고 사진에서, 또는 영화에서 우릴 인식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누군가 우리를 보고 어떤 다른 사람과 닮았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더 이상 그 이유에 공감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식들을 다시 발견하지 못하고 우리 부모님 안에서 우리를 다시 찾지 못한다. p45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포스트 코이눔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이스트/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
이 책의 원제 'animal triste'는 한동일의 책 <라틴어 수업>에도 나온 문장이다. 소설의 원제목이 이 라틴어에서 나온 것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성교 후에 모든 동물은 우울하다는 문장과 격렬한 사랑 후에 화자에게 남은 것이 고독한 삶과 우울이라는 것이 겹친다. 에디뜨 삐아프는 '사랑의 찬가'를 불렀지만 그녀의 사랑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우리는 안다. 사랑은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와서 영혼을 흔들어놓고 사라져버리는 신기루 같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인지조차도 아직 알지 못한다.” 화자가 말한 이 구절처럼. 이 책을 다 읽고 책을 덮으면 화자의 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다만 이 책에서 말하는 사랑이 남녀간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인지, 기이한 시대에 태어나 역사적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슬픔인지, 또 현재에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대변하는 문명의 충돌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혼란과 고독을 말하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충분하다.
분명한 것은 이 소설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기이한 시대'라는 표현은 통일 독일로 인해 혼란스럽고 기이한 경험을 했던 독일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백여년의 시대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세계대전의 기간에 우린 일본 침략의 고통과 해방의 순간을 그리고 6,25전쟁과 독재의 시대, 민주화라는 격렬한 변화를 겪으며 살아왔던 대한민국에서도 충분히 논의될 수 있는 이야기고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 과정은 격변의 시기에도 여전하며 그 과정에서도 불륜과 배신도 분명 존재하니까.
우리를 실망시키는 것이 꿈의 무상함인지 현실적 삶의 무사함인지 가리면 뭐가 달라질까? 내가 그것이 꿈이라고, 꿈일 수밖에 없다고 스스로 다짐하면 나는 그 꿈이 언젠가는 끝날 것을 알게 되고, 따라서 그 순간에 무조건 빠져들 수 있다.p96
프란츠에 대한 내 감정의 억제할 수 없는 성질이 공룡성에 있었다는 것을 나는 나중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달리 말하자면 모든 문명적 규범을 무시하면서 그렇게 사랑했던 것이 내 안에 있는 공룡성, 원시적인 어떤 것, 격세유전의 폭력성이었다는 것을 이해했다. 언어를 필요로 하는 어떤 것도 프란츠에 대한 내 사랑을 올바르게 표현할 수 없었다. p108
그래도 우리가 꼭 원하던 것을 정확하게 알았던, 시작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었다.p116
밟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나다. 밟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너다. p122
나를 자극하는 것은 불완전함과 몰락이 시작되는 흔적들이 아니라 그 몸의 이질적 본질이었다.p126
내가 태어났을 때는 전쟁 중이었다. 내가 일찍 죽을 때까지 전쟁이 지속되었다면 한지 페츠케와 내가 독을 먹고 죽은 쥐를 보통 장난감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나는 전쟁을 자연스런 삶으로 여겼을 것이다. p137
그들이 처음 만났던 브라키우사우르스의 거대한 몸집과 조그마한 머리, 이제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과거의 유물인 공룡처럼 어쩌면 사랑이란 추상적인 감정도 그 격렬함이 지나고 난 뒤에는 앙상함만 남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불륜이란 상식의 선에 반하는 감정이라면 더더욱이나. 소설을 덮으면 어느 한 시대, 어느 한 국가, 어느 한 인물에게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 우리 모두의 시대에 관한 이야기라는 생각에서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우리는 문명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여전히 야만의 시대, 모순의 시대, 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게 아닐까. AI가 인간을 학습한 뒤 인간을 어떻게 이해할까. AI에겐 이해라는 또 인간의 감정과 같은 게 없으니 그들은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반응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