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우체통

독서일기 13

by 이성주

'나비의 무게'를 읽고/에리 데 루카


1.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바람에 춤을 추는 한 장의 꽃잎처럼 산양 왕의 머리 위에서 팔랑거렸다. p18


승리의 기쁨에 취해있을 때 어깨 위에 앉았던 나비 한 마리의 무게, 죽음의 무게에도 힘을 싣는다는 걸 우리는 모르고 산다. 하얗게 머리 위에 눈이 내리고 어깨 위에 가벼운 공기조차 무겁게 짓누를 때가 돼서야 깨닫는 많은 진리들, 죽는 순간까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냥꾼의 주검에서조차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을 깨닫지 못할 테니까. 젊음은 어떤 것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제 발의 무게조차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승리에 취하고 패기로 휘둘린다. 젊음은 삶을 마주하고 있지, 죽음을 마주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종착역이 죽음이라는 동일한 목표점이 있어도 젊음에게는 삶이, 가까운 삶이 먼저 다가온다. 어쩌면 젊음은 하얀 나비 한 마리와 함께 춤을 추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이 나비인 것처럼. 지상에 앉은 배부른 독수리는 허점투성이인 것처럼 쉽게 사는 법을 알게 된 동물은 동물의 본성을 잃어버린다. 인간에게 생각하는 힘이란 동물과 다른 가장 탁월한 힘이고 능력이다. 그러나 인간도 편안한 삶을 따르다 결국 생각하는 힘을 잃어버리게 되면 다른 여타의 동물과 다름이 없다. 그야말로 허점투성이이다. 언제 동물들의 먹이가 될지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이미 정글로 변해버린 지 오래다. 그러니 인간임을 포기한다는 것은 정글 속에서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맹수들의 야만성으로 흉한 몰골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생각 없는 인간들의 미래일지 모른다. 인간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는데 익숙한 갈매기들이 스스로 먹이를 구하지 않고 인간의 발밑을 맴돌고 자기 영역으로 다른 갈매기를 부리로 쪼며 험악하게 몰아내는 모습은 너무나 보기 흉하다. 날기를 잃어버린 갈매기를 새라고 할 수 없듯이 생각을 멈춰버린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스어로 ‘나비’는 프쉬케이다.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는 어리석은 욕망 때문에 에로스와의 사랑을 잃어버린 프쉬케는 영혼이란 뜻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인간에게 영혼이란 그 가벼움만으로는 중요성을 가늠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에게 무게를 잴 수 없는 영혼이란 인간을 다른 존재와 차이를 분명히 한다. 나비는 한껏 가볍게 날지만 가벼울 수 없는 이유가 그래서일까. 나는 팔랑팔랑 날아가는 나비 한 마리를 쫓는다. 돌아가신 나의 어머니의 무게를 그대로 느끼기 때문이다.


2.


두 발로 딛고 직립하면서 인간은 양손의 자유를 얻었지만 그만큼 속력은 잃은 셈이다.p57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축복이다. 나는 태어나면서 이미 운 좋은 선택을 입었다. 나는 무게 없는 나비로 태어날 수도 있었고 귀여운 강아지로 태어날 수도 있었고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지렁이로 태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인간임을 느끼고 생각하는 힘을 가진 사람으로 선택되어졌다. 게다가 수많은 혜택을 받고 성장할 수 있었다. 부모로부터 돌려줄 수 없는 사랑을 받았고 육신의 건강함으로 갈 수 있는 곳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었고 노래할 수 있었으며 절대적 빈곤의 순간을 경험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그 덕분에 고통을 최대한으로 느끼게 되었고 지독한 외로움을 알게 되었고 신뢰가 배신당하는 경험도 했고 대답 없는 사랑도 했다. 무엇보다 늙어가는 비애를 느끼며 살아야 한다. 또한 많은 혜택으로 기회를 얻었지만 그 기회가 성공을 가져오지 않았고 수많은 실패와 과오로 인정받지 못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 나의 삶 속에 행운과 불행은 생각하기에 따라 좋은 쪽으로도 나쁜 쪽으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운 좋은 삶이란 축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운이란 매 시간 매 순간 반복해서 한 사람에게 주어질 수가 없다. 생각하는 힘이 주어진 반면 세상의 부조리를 확인하면서도 바꿀 수 없는 절망에 빠져야 하고 걷는 대신 속도를 잃어버렸고 아름다운 육체를 얻은 대신에 쉽게 망가질 수 있는 구조를 가졌고 아름다운 얼굴 대신에 그것을 평가하는 눈도 함께 가지게 되었다. 말과 글을 쓸 수 있는 대신에 그걸 이용해서 타인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게 되었으며 모든 동물 중에서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 같지만 모두를 죽을 수도 있는 폭력성도 함께 갖고 있다. 지혜도 가졌지만 어리석음도 함께 갖고 있으니 우리는 끝없이 선택하고 선택하면서 생각이 주는 결과를 지켜봐야만 한다. 좋은 부모, 배우자, 친구를 만나는 행운 속에서 경제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은 책임도 함께 요구한다. 때론 그 책임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갈망도 느끼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아서 힘이 들기도 했다. 선택은 결과가 있기 마련이고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욕망은 그 모든 책임을 외면하고 싶기도 하다. 이성은 내가 누리는 혜택을 나누라고 하지만 감정은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고 나만의 안락함만을 쫓고 싶어진다. 나의 이 가벼운 선택이라니, 무거운 몸으로부터 탈피하여 가볍게 날아갈 수 있는 자유를 외면하는 어리석음이라니, 그래서 나는 여전히 이 세상을 배회하는 존재이다.


3.


지나간 계절과 미지의 계절 사이를 가로지르는 청명하고 완벽한 경계의 날이었다. 지칠 대로 지친 육체의 피곤함은 아름다운 계절과의 이별에 썩 잘 어울리는 것이었다.p108


어느 날 내게 죽는 날짜와 시간이 주어진다면 죽은 순간까지 남은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 내가 여태껏 살아오며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내게 남아있을까.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는 벨기에의 천재적인 감독 ‘자코 반 도마엘’의 영화다. 영화 속에서 신은 참으로 허접한 존재다. 컴퓨터로 사람들의 인생을 관리하고 그의 고약한 취미로 인간은 천재지변을 겪어야 한다. 그는 선한 마음이라고는 조금도 없다. 그는 딸을 학대하고 아내에게는 가부장적이며 폭력적이다. 인간으로 치더라도 말종이다. 어느 날 아버지의 학대로부터 딸이 도망친다. 딸은 도망치면서 아버지의 컴퓨터로 인간에게 죽는 날짜와 시간을 알려주는 메시지를 전송한다. 그리고 컴퓨터를 고장낸다. 컴퓨터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아버지 신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다. 인간 세계로 도망치는 딸을 좇아 인간 세계로 오는 아버지, 그는 기적도 사랑도 없는 길거리의 노숙인과 다를 바가 없다. 인간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 순간 자신이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것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 순간 그 무엇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나 자신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수명이 오래 남은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이 죽나 죽지 않나 실험해본다. 결국 삶이 많이 남은 사람도 삶을 확인하고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 역시 삶을, 현재를 확인한다. 죽음은 삶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장치고 삶은 죽음의 순간으로 가는 마디마디의 이어짐이다. 점점이 삶이라면 선의 끝이 죽음이다. 그러나 선의 끝과 시작을 명명할 수 없듯이 삶의 시작과 끝도 규정할 수 없다. 신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뀐다한들 하늘이 파란색에서 꽃무늬가 가득한 환타스틱한 모양으로 바뀐다한들 무엇이 달라질까,라는 절망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는한 신은 여전히 허접하고 인간들의 삶은 죽는 걸 전제로 하고 있음에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삶을 훼손하고 현재를 망가뜨리고 타인의 행복을 가로챌 것이다. 결국 죽음 앞에서 송두리째 벌거벗은채 자신의 지나온 시간을 돌아봐야할 순간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스스로 탈피해서 나비가 되는 작은 곤충만도 못한 것을. 우리가 누리는 이 혜택이 우리가 갖고 있는 어리석음으로 재앙이 될 수도 있음을 느낀다.


4.


세월의 무게에 더해진 깃털, 모든 걸 무너트릴 수도 있는 깃털이었다.… 나비의 무게가 그의 텅 빈 한 줌의 심장 위로 떨어졌던 것이다. p126


자코 반 도마엘의 ‘미스터 노바디’는 118살의 니모가 자신의 인생을 회고하며 기자와 인터뷰하며 과거를 보여주는 형식이다. 부모의 이혼으로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질문이 던져지면서 선택의 기로에 있었던 니모는 매번 선택을 통해 달라진 인생을 살게 된다. 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선택을 통해 다른 삶을 살게 된 니모에게 진짜 인생과 행복이 무엇인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선택은 나의 몫이고 그에 따라 달라지는 인생 속에서 내가 어찌 해볼 수 없는 일들, 그리고 그것을 주관하는 보이지 않는 힘과 질서들은 얼핏 보면 ‘나비의 무게’에 나오는 사냥꾼과 사냥왕의 관계와 그들이 평생이 살아왔던 인생과 다르지 않다. 어떤 선택이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죽음 앞에서 부질없이 보냈던 수많은 시간과 선택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벌어졌는지를 되돌릴 수 없을 때가 되어서야 깨닫게 된다. 그들이, 우리가 보냈던 시간의 의미와 그 허망함을. 자연 속에서 내 힘이 아닌 어떤 보이지 않은 힘에 의해서 진행되는 질서와 규칙은 수없이 인간이 만드는 질서와 규칙 법들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억지와 강압이 없으며 순리에 따르는 질서야말로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질서이고 규칙이다. 그 자연이 법과 질서를 거스르는 인간들은 매번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와 절규를 남기며 어떻게든 자연을 해치고 깨뜨리지만 그것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한정된 시간만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신의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인간들에게 신은 늘 같은 대답을 할 뿐이다. 죽음이란 피할 수 없는 진실 앞에 서게 하는 것, 그리고 그 죽음을 앞당기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커다란 사냥의 전리품이 아닌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죽음을 전제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현재는 소중한 시간이다. 헛되이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재에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게으름이다. 자신이 자기를 제일 잘 아는 법, 목표를 정해놓고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성실과 부지런함은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그럼에도 나는 매번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정해놓은 목표를 눈감아 버린다. 물론 그 목표야말로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의미 없이 보내는 시간이야말로 부질없는 목표를 향해 부나방처럼 뛰어드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인지 모르겠다. 쉼의 시간, 천천히 걷는 걸음처럼 목표를 향해 가는 동안에도 필요한 것이겠지만 현재를 제대로 누릴 줄 아는 것, 그리고 사색의 시간을 통해서 덜어냄과 채움을 적절히 해야 한다는 점에선 내가 앞으로 나갈 길에서 꼭 필요한 것이다. 카르페디엠, 현재를 제대로 향유할 줄 아는 것, 신은 언제나 내 곁에 나의 삶은 더욱 의미있게 나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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