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에 대하여(2)

생각하는 우체통

by 이성주

과거를 기억할 때 나는 두 개의 상반된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건 무의식적 태도이기 때문에 나중에 바로 후회할 때가 많다. 과거의 모습이 지금의 생김새나 느낌과 다르게 꽤 괜찮다고 항변하게 되는 이유는 지금의 내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을 때이다. 이 부분이 정말 부끄럽다. 시간의 흐름대로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옹졸함이다. 어쩌면 이건 내 편견을 부지불식간에 인식시켜 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 다른 하나는 나의 행위와 마음 상태이다. 전자가 외면의 나라면 후자는 내면의 나일 것이다. 그런데 태도는 정반대이다. 외면은 젊은 내가 좋고 내면은 현재의 내가 그나마 좀 더 낫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다. 유치하고 자기 과시로 떠들었던 가벼움, 무엇보다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진실하지 않았던 일도 꽤 있다는 걸 이제는 시인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분명 나는 마음으로부터 행한 행위와 말에 대한 무게가 지나치게 가벼운 과거의 나를 기억할 때면 부끄럽고 얼굴이 화끈거리는 일이 제법 있다. 그래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어쩌면 좋은 것만을 취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은 추억마저도 그래서 취사선택하는 건지 모르겠다.


니체가 썼다는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 책을 읽으며 공감하는 부분이 꽤 있다. 일단 책 속의 내용이 보다 심오한 의미로 썼다손 치더라도 즉자적으로 내 마음을 평화롭게 한다. 이를테면 이런 문구다. '삶에 대한 오류는 삶을 위해 불가피하다- 삶의 가치와 존엄성에 대한 모든 믿음은 순수하지 못한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일상적인 생활을 하는 보통의 사람에게 삶의 가치란 오로지 자신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 말인가. 내가 내뱉었던 철학적인 말이나 고상해 보이는 말조차 결국은 '나'라는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한 결과물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이란 존재의 본질이라니. 젊은 날의 그 치기 어린 행위와 말을 부끄럽지만 그것에 너무 매몰되지 않기로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씁쓸하게 남는다. 그건 우리가 배웠던 그토록 오랫동안 나의 사유 세계를 지배해 왔던 종교적 신념이나 철학적 관념이 너무나 단단하기 때문이다. 코 푼 휴지를 가방 속에 넣어 다니면서 쓰레기통을 발견하기까지 내 가방이 지저분해지는 걸 감내했던 그런 종류의 도덕적 판단과 의지들 때문이다. 위로는 잠깐이고 여전히 부끄러움은 내면 깊숙이에서 나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그런 일들이 어디 한두 가지겠는가.


텔레비전에서 공적인 얼굴(?)로 거짓말을 밥 먹듯이 내뱉는 공무원들을 매일 들여다봐야 하고 뉴스에서는 천인공노할 범죄자의 인권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뿌옇게 가려진 얼굴의 범상치 않은 사람들이 언제 다시 출소해 나와 내 가족과 지역사회의 위협이 될지 모른다는 사실에 전화받는 일조차 전전긍긍해야 하는 요즘에 부끄러움은 왜 도덕과 종교로 무장한 선량한 사람들의 몫인지 회의가 일기도 한다. 물론 요즘은 종교를 앞세워 법을 어기는 사람들도 참 많지만. 그럼에도 대다수의 종교를 가진 사람은 선행과 선심으로 무장하고 매일매일 반성하며 하루를 마칠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부끄러움은 일상을 살아가며 자기를 가장 순위에 놓고 살면서도 자신의 가치보다 공공의 가치와 우리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만의 몫이 되었을까. 그러다 문득 기생벌이라는 아주 괴상한 벌을 알게 되면서 조금은 이 지구상에 있는 동물계의 인간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생벌은 숙주로 삼은 애벌레나 번데기 등에 산란관을 삽입해서 알을 낳는다. 아름다운 나비가 될 줄 알았던 번데기나 애벌레는 성충이 되기도 전에 기생벌의 알 속에서 부화한 새끼 기생벌의 먹이가 된다. 그 속의 알은 성충이 되어 영화 에어리언의 외계 생명체처럼 번데기나 애벌레의 껍질을 찢고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곧바로 교미를 하고 다시 기생할 번데기나 애벌레를 찾는다. 동물계는 원래 그런 법이다. 어떠한 존엄보다 생존이 가장 중요한 법이고 인간들도 동물과 다르지 않으니 생존력이 강한 사람들은 호시탐탐 먹이를 노리듯 약한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다. 곤충의 세계에서 벌어진 그 말할 수 없는 허망함을 경험하고 나서야 세상의 일이 조금 이해되기 시작한다. 분연히 세상일에 흥분할 일도 노여워할 일도 없다는, 조금은 허망한 포기의 감정이라니.


앞서 말한 니체의 책 <인간적인 너무 인간적인>에서 도덕은 우리가 그 야수에게 물려 찢기지 않기 위한 필연적인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동물성을 외면하고 좀 더 고상한 존재라고 생각하며 엄격한 규율로 자신을 얽어매지만 결국 위계와 생존이라는 첫 번째 목적으로 인간은 쉽게 거짓말을 당연히 하고 말이 하는 약속과 감정의 배반 사이에서 늘 그렇게 줄다리기하며 나약한 인간의 속성을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200년 전의 니체가 살았던 시대의 인간에게서 인간은 전혀 발전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인공지능이라는 최첨단의 기술을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 시대조차.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은 드러나지 않고, 선하고 도덕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숨어 있으며 그것이 이 세상을 지탱하는 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위안이 된다. 미디어의 발달은 뻔뻔하고 오만하며 악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비춤으로써 그들이 다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환하게 보여지는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전부가 아니다. 식물의 광주기성에 의하면 밤과 낮이 교차하는 곳에 살아야 광합성도 하고 엽록소 생성도 하며 성장하고 개화한다고 한다. 빛만 비치는 곳의 식물은 그 모든 것을 제어당해 스트레스로 성장과 개화 모든 점에서 장애를 갖게 된다고 하니, 24시간 빛을 쬐고 잎을 만들게 하는 식물이 스스로 자살한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가 맞을 것도 같다. 우리가 지은 부끄러운 일에 부끄러운 감정을 갖는 것은 우리가 진보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또 빛에 노출되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잘 나가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은 광 주기를 잃은 식물과 같은 스트레스 상황에 놓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오늘, 어제의 행위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그 행위는 고양된 나의 성숙한 마음 상태일 것이다. 문득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羞惡之心(수오지심)을 아는 건 의(義)라고 말한 맹자의 말이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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