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정 엘리트인가

by 이성주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의 논고'에서 발췌한 "나의 언어의 한계는 나의 세계의 한계를 만든다"라는 문장을 읽고 또 읽는다. 언어는 '나'를 표현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다. 모국어만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것의 차별점은 모국을 떠난 후에 바로 드러난다. 내가 태어난 곳이 아닌 곳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에서 나의 권리를 훨씬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또한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게 될 경우 그건 굉장히 큰 장점이다. 언어는 창의력을 발현시키고 지역 사회에서 소통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사피어 워프 가설이라는 언어결정론이 그것이다. 한국인의 특별한 공동체중심 문화는 어쩌면 한국어와 한국어를 기반으로 발명된 한글 때문일 수도 있다.


쿠팡사태를 다시 보게 된다. 한국을 기반으로 해서 플랫폼을 만들고 거의 대부분의 수익을 한국에서 얻는 '한국 사람'처럼 생긴 사람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쿠팡이란 기업이 미국 기업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그렇다면 그는 왜 한국에 플랫폼을 만들었을까. 한국인을 무시해서? 한국인은 상거래 플랫폼이 없으니 이익을 내기 위해서? 본인인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 플랫폼을 만들었을 때는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작용했을 것이다. 그에게 한국인이란 정체성과 이익이 상충한다. 그때 그의 정신세계를 흔드는 건 부모의 국적이었던 곳이 아니라 자신이 공부하며 획득한 언어, 역사, 사회일 것이다. 물론 글로벌 자본주의의 속성, 기업의 이익 극대화라는 목적성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는 한국적 정체성과 글로벌 기업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선택한 태도일지 모른다. 결국 개인주의와 자본주의 최첨병의 나라에서 교육받은 그에게 공동체 의식을 기대할 수 없다. 결과를 보면 그렇다.


엘리트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다. 소위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을 우린 엘리트라고 했다. 그리고 조선시대부터 우린 소위 양반, 교육받은 이들의 판단을 존중했다. 그들의 판단은 공정할 거라고, 그들의 결정은 옳을 것이라는 믿음. 하지만 그렇지 않았던 경우가 많았다. 대한제국의 운명을 구렁텅이로 빠뜨린 이들 중 상당수는 양반, 교육받은 엘리트였고 선택권이 없던 민초들은 그들이 내린 결정으로 아들을 타국의 탄광과 전쟁터에서 죽음으로 내몰렸고 딸은 일본 천황의 영화를 위해 끌려간 일본군(한국인을 포함)의 성노예로 굴욕적인 삶을 살게 되었다. 해방되고 나서도 이 엘리트들은 나라의 운명을 외세에 넘겨주었고 독재를 하기 위해 헌법을 무시했다. 그렇게 군인이 쿠테타를 일으킬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거기에 한몫을 한 게 사법부였다. 물론 반역과 배신의 역사를 써왔던 엘리트의 반대에서 국가의 독립과 건립, 새로운 정치사를 쓴 인물도 많았다. 한국의 민주화를 이끈 사람들 중에서 지식인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우린 엘리트에 대해서 의심한다. 역사는 한국을 새로운 강대국으로 돋을새김 하려고 하는데 여전히 소위 엘리트라고 하는 사람들은 나라의 운명이 자신의 손에 있다고 믿는다. 그 동안 한국은 조선, 거슬러 올라가 언제나 민초들의 민란이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일제 침략기에 머나먼 타국에서 배우지 못했지만 국가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수많은 이름 없는 독립투사들, 6.25 전쟁에서 죽어간 군인들, 심지어 외국에서 온 사람들조차 그랬다. 언제나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건 엘리트였다. 그 틈을 비집고 야수와도 같은 인물이 세계의 역사와 우리의 역사를 피로 물들였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보면 전쟁도 어쩔 수 없는 생성과 소멸의 과정 중 하나가 될 수밖에 없다. 전쟁은 종의 확장과 적절한 종의 개체수 유지를 위해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전쟁은 자연적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지만 다른 종과 다르다는 것을 교육시키려면 적어도 다른 선택을 해야 한다. 리처드 도킨스가 '인간 역시 유전자를 전달하는 기계'라는 표현에서 엘리트는 그저 공부를 잘하는 기계이고 어떤 이는 도로를 잘 건설하는 기계이며 어떤 이는 상업을 잘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니 공부 잘 한 엘리트에게 무조건 고개를 숙이고 그를 추앙(?)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떤 기능에 특별한 것은 그저 재능일 뿐이다. 이제 비굴해지지 말자. 엘리트가 스스로 공부 잘하는 기계로만 그친다면 어쩌면 그 역할은 인공지능을 착장 한 로봇이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공지능 로봇을 추앙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앙하고 존중하고 귀를 기울이는 엘리트의 말은 책임지고, 정직하며, 무엇보다 상식적일 때 그렇다. 자본이 정신의 우위에서 세상의 가치를 바꾸려 할 때, 인간이 물질의 가치에 무릎 꿇는 일이 흔하게 되는 시대에 엘리트의 역할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배움으로 평가되고 가치를 매김 당하면 안 된다. 객관적으로 보고 위선적 엘리트의 말에 흔들리고 우리의 삶을 그들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우린 스스로를 존중할 수 있는 존재이고 존중받아야 할 존재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지속적으로 나아갈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만이 진짜 엘리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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