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의 7년을 반쯤 접고 다시 울산으로 돌아가며 삶이 가벼워집니다. 울산 집에는 최소한의 살림만이 있습니다. 아침이 가볍습니다. 청소하는 손이 가볍고 시간 또한 헐렁해짐을 느낍니다. 그러다 서울로 돌아오면 오래 묵은 살림에 기가 눌립니다. 청소를 하기도 전에 지쳐버립니다. 물건에 혼이 깃든 것도 아닌데 나는 내 살림들이 내려다보는 그 기운에 지쳐 움직임도 둔탁해집니다. 내 살림은 내 욕망의 발현입니다. 옷장 속에 가득한 입지 않은 옷들과 부엌 씽크대에 쌓여있는 쓰지 않는 그릇들과 책장에 가득한 보지 않을 책들과 어수선하게 놓여있는 가구, 가전들이 나를 짓누릅니다. 그건 또 다른 나의 욕심과 과시의 욕구들의 결과물입니다. 그렇기에 나는 그것들에 둘러싸여 지쳐가며 늙는 것이겠지요.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관계의 폭이 좁아질줄 알았더니 다른 부분에서 확대되고 있습니다. 각종 동창회와 동호회 모임, 그리고 그들을 한데 묶는 인터넷과 sns의 공간이 더 많은 관계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좋아하다 보니 과거의 인연들이 그립기도 하고 외로움에 새로운 인연을 찾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약속들은 사람들 속에서 내가 외롭지 않다는 과시의 효과를 보이는듯 하지만 무수한 약속으로 인해 실은 더 허허로운 경우가 많습니다. 무엇보다 혼자 있으면서 인간으로서의 질문들을 놓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삶의 가치에 대한 질문입니다. 관계가 복잡할수록 우리는 상대에게 몰입하거나 진지함을 잃기가 쉽습니다. 나 역시 약속에 허덕이며 하루를 보내다 실수와 후회로 점철된 관계를 되풀이 하고 있더군요
필요한 것과 갖고 싶은 것들의 목록, 삶을 조금씩 목록화해서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새해에는 내 삶의 가치와 성실함을 기대해 봅니다.
젊고 활기가 차던 사람이 어느 날 수족조차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될 때 그 상실감은 엄청날 것입니다. 게다가 욕구와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욕망을 해소하며 살아온 사람에게 침대와 의자에만 익숙한 삶을 강요한다면 그 고통이 얼마나 클까요.
어느 날 친구로부터 이야기 하나를 들었습니다. 젊은 날 패기 넘쳤던 시인 한 분이 연세가 들어 뇌졸증으로 쓰러지신 겁니다.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만들었던 사람이면서 성실한 직장인으로서도 성공하고 시를 통해 예술적 감성을 완성시켰던 분이었습니다. 그런분에게 뇌졸증은 큰 절망이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잠들지 않은 시에의 열망이나 감성들을 제대로 배출할 수 없다는게 커다란 슬픔이었을 겁니다. 사방이 벽인 방에 갇혀서 그 문을 열고 나갈 자유의지에 대한 실행이 막힌다면 존재에 대한 상실감까지 느낄 수 있었을 겁니다.
"바다에 한 번만 나갈 수 있다면 시 한 편을 쓸 수 있을 거 같아요."라고 말한 노시인의 말이 가슴에 박혔습니다. 바다를 보는 행위가 시인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까요. 두 발로 저벅저벅 걸어가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거칠게 우리의 심상과 삶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밀려오는 파도를 마주하고 있으면 혈관을 흐르는 혈액의 뜨거움이 뇌와 가슴을 젊음으로 돌려놓을 거 같은 착각을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상실감, 시인은 어쩌면 허망한 삶의 편린을 마주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잃어버린 것이 젊음이 아니라 정말 소중히 했어야 할 것들을 스쳐버린 것들에 대한 회한이 아닐까요. 가령 담배 연기가 주는 희뿌연한 미래에 대한 고통 같은 거 아닐까요.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에는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선명한 귀결점만 있으니까요. 아득히 먼 시간을 두고는 분명한 명제인 죽음은 떠올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다지 녹녹치 않습니다. 어쨋든 어떤 일이든 예기치 않은 일은 또 나이를 불문하고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노시인은 그 불현듯 가고 싶은 바다가 젊은 여인의 치마폭과 같은 열정을 끌어내는 기폭제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요. 사랑은 모든 예술, 삶의 원동력이니까요. 바다를 보는 것도 젊은 여인의 분내도 아련하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