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는 위계에 있어 나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한다. 평판은 위계 없이 주변 사람들이 나의 일상을 보고 판단한다. 평가로 내 위치가 더 나아질 수 있을지 모르나, 어느 순간 평판으로 추락할 수 있다. 우리는 상승 욕구에 매몰되어 평가에 전전긍긍한다. 그렇게 오르고 나면 밑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낭떠러지 위에서 아래를 보지 않듯.
하지만 손에 쥔 것의 감각은 쥐는 그 찰나뿐이다. 의식하지 않으면 잊힌다. 산해진미의 맛을 결정하는 것도 혀에 처음 닿았을 때의 감각일 뿐, 목구멍으로 넘어간 후의 감각은 모두 같다.
최근 이사를 하며 나는 이 소유의 느낌이 찰나와 같은 감각이란 순간을 통과했다. 영원한 소유의 감각, 환희에 찼던 순간은 짧았다. 곧 집은 욕망의 증거물들로 채워졌고, 처음의 넉넉함은 사라졌다. 나는 다시 더 높은 평가를 갈구했고, 그것을 욕망 실현의 수단으로 삼았다. 소유의 상징이었던 열쇠를 새 주인에게 넘겨준 뒤 낯선 방에 누웠을 때,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내 몸의 일부처럼 익숙했던 거실의 채광과 복도의 공기가, 이제는 타인의 생을 지탱하는 배경으로 완전히 넘어가 버렸다는 것을. 내 몸이 기억하던 벽의 감촉과 공간의 무게가 단숨에 지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내가 그곳의 주인이 아니라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방문객'이었음을 알게 됐다. 내가 소유했다고 믿었던 것은 사실 그 공간을 빌려 썼던 '시간'에 불과했다.
진귀한 재료로 만든 음식도 맛이 없으면 그만이다. 손에 쥔 물건의 가치는 소유하는 순간 수직낙하한다. 언제든 꺼낼 수 있다는 안도감이 긴장감을 지우기 때문이다. 이사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집의 크기를 다시 인식하고, 우리에겐 영원한 소유권이 없음을, 그저 빌려 쓰는 '임차권'만이 있음을 절감한다.
높은 점수에 목말라했던 만큼, 어느 순간 우리는 자신이 소비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낭떠러지 위에서 밑을 보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 마지막 발을 내딛는 것이 내리막의 시작이다. 가치와 자신을 내던지는 순간, 욕망 게이지의 상승을 막지 못할 때 나는 퇴행한다.
우리는 모두 길 위에 있었다. 새로운 길을 내는 것은 모험이다. 모험을 떠나는 이를 잡을 수도,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다. 우리는 제 몫의 욕망을 지고 인생이란 여정을 걷고 그것을 위해 선택한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결국 스스로의 몫이다.
다만 분명한 건, 우리는 고작 백 년 남짓의 시간 동안 공간과 물건, 자연의 아주 일부에 세 들어 사는 존재라는 점이다. 떠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내 인생 전체가 우주의 역사 중 아주 짧은 기간 빌려 쓴 조각이었음을 알게 된다.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건, 남겨진 이가 쥐여준 노잣돈 몇 푼 뿐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가볍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