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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Oct 20. 2021

진실을 모르는 게 더 나을 때

사색하는 우체통

  가끔 글을 쓰다 보면 거짓말을 쓰고 싶을 때가 있어요. 사람의 마음을 끌기 위한 수단으로요. 그런데 독자는 기가 막히게 거짓과 진실을 가려낼 줄 알아요.  소설을 쓸 때야 픽션이니 마음 놓고 거짓말을 쓰는 거지만, 오히려 소설을 쓰려면 내가 겪었던 일들을 쓰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나도 습작으로 소설을 써보곤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아요. 내 경험과 상황들이 어떠한 형태로든 들어가니까요.  사람의 마음을 끄는 글은 진솔하고 솔직한 글이라고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거 같아요. 자극적이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래서 이야기꾼은  재미있으면서도 진솔하고 흥미진진하면서도 꾸미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지만 매력적인 이야기를 만들어야  해요.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그럼에도 세상엔 글보다 이야기꾼의 이야기보다 더 관심을 끄는 것들이 많아요. 꼭 꾸미지 않아도 될 정도로요. 그럼에도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하루에 수많은 거짓말을 한다고 해요. 인사말에서 시작해 업무에서, 일상생활에서 가족끼리 친구끼리 동료들 사이에서 하얀 거짓말이든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혹은 왜소해지기 싫어서든.  어떤 면에서 거짓이 순기능으로 작용할 때도 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진실이 가려진 세상이란 생각에 슬프기까지 하지만 진실이 늘 그렇게 좋은 것만은 아니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아주 오래전 일이에요.  사흘의 일정으로 나는 서울에 상경해서 1박 2일의 일정을 보내고 친척집에 갈 일이 있었어요. 5촌 당숙이 폐암에 걸려서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았거든요. 아저씨는 아버지의 가까운 친척이었고 일가가 별로 없는 저에겐 꼭 찾아뵈어야 할 어른이셨어요. 일정이 끝나고 저는 택시를 타고 아저씨가 사시는 동네에 갔었어요. 아주머니하고 통화를 하고 택시에서 내렸는데 택시를 떠나보내고 나서야 핸드폰이 없는 걸 발견했어요. 아주머니와 택시에서 내려 통화하기로 했는데 그렇게 난감할 수가 없는 거예요. 멀리 주유소가 보이고 공공건물로 보이는 게 전부였던 곳에서 나는 막막했어요.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요. 마침 겨울이라 찬 바람이 얼굴과 목덜미를 헤집고 들어오는데 조금 있다 얼굴로 손등으로 두드러기가 올라오더라고요. 온도 변화에 예민한 피부를 가진 탓이었죠. 어쩔 수 없이 주유소로 걸음을 옮겼죠. 불빛이라고는 주유소밖에 보이지 않았고 다행히 주유소엔 사람이 있었어요. 내 나이 또래의 여자분이 그 시간까지 혼자 사무실을 지키고 계셨죠. 처음 보는 분에게 도움을 청했어요. 사정이 이러해서 내가 전화를 좀 써야겠다. 따뜻하신 사장님 덕분에 나는 그날 전화통화를 했어요. 아주 복잡한 과정을 거쳤지만요. 내가 알고 있는 전화번호를 통해 물어물어 당숙 댁을 찾아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얼마 후에 당숙은 돌아가셨어요.


  주유소 사장님이 아니었다면 나는 당숙을 만나 뵙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야 했을 거예요. 그때 따뜻하게 추위를 피하게 해 주시고 여러 통화를 가능하게 해 주셨던 사장님이 너무나 고마웠어요. 그분이 주유소를 운영하게 된 과정도 설명을 들었죠. 저는 오랫동안 그분의 고마움을 잊지 못했었어요. 꼭 나중에 찾아가 사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어요. 내가 살던 곳과 완전히 동떨어진 곳을 일부러 찾아가기가. 서울로 이사를 하고 나서야 마음만 있던 걸 행동으로 옮겨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울에서 조금 벗어난 도시까지 찾아갔어요. 그런데 그때 그 주유소에는 낯선 사람들만 있는 거예요. 나이 드신 아주머니와 그분의 아들로 보이는 분이 실제 그 주유소의 소유주라고 하시더군요. 주유소 근처도 많이 변해서 처음엔 잘 찾지 못했어요.. 주유소 직원들과 나눠 드시라고 음식과 음료를 싸 갖고 간 저는 당황했죠. 그리고 거기서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진실을 마주하게 됐죠.  젊은 사장님이라 생각했던 그때 그 따뜻했던 여자분은 원래 주유소에서 일하시던 분이었대요. 그리고 그 당시 사장님은 돌아가셨다고 해요. 돌아가신 사장님의 내연녀였던 그 젊고 따뜻한 사장님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험담을 하시는 두 분을 보는데 그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하나, 어쩌나 어정쩡하게 서 있었죠. 무엇보다 손에 들고 간 음식이 무색해졌어요. 그래도 그 음식을 직원들과 나눠 드시라고 하고 주유소를 나왔어요.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 황량한 거리에서 내가 맞닥뜨렸던 그 난처함을 해소해주었던 한 여자의 진실은 차라리 몰랐으면 했던 거였죠. 그 여자분의 거짓말이 제겐 더 진짜처럼 느껴지는 건 뭐일까요.  진실은 한 가정의 파괴범이고 자신의 재산이 아닌 걸 자신 것처럼 포장했던 사람이었는데 그날의 그 여자분은 따스한 온기가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줬던 착한 사람이었으니까.


  세상엔 거짓 같은 진실과 진실 같은 거짓이 혼재해 있는 거 같아요. 절대적으로 나쁜 사람도 없고 절대적으로 착한 사람도 없는 세상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두 개, 아니 수십 개의 얼굴로 살고 있을 거예요. 다만 바람이 있다면 내가 만날 때 선한 얼굴의 가면으로 나를 대하길 바라지만 선한 얼굴이 베푼 마음이 나중에 고통으로 돌아올 때도 있으니 스스로 마음의 경계를 단단히 해야 하겠지만요. 그날의 따뜻했던 기억은 사실 잃어버린 휴대폰을 다음날 기사님이 갖다 주신 거였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따뜻한 기억들은 그냥 그대로 간직하고 다시 되돌리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받은 따뜻한 선행의 기억은 다시 다른 이에게 돌려주는 게 오히려 더 큰 울림이 있을지도. 때로 뒤로 돌아가 마주하게 되는 진실은 모르는 게 더 나은 일이 많은 것 같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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