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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Oct 18. 2021

아침이면 잊는다

생각하는 우체통

   어떤 작가는 항상 머리맡에 수첩과 펜을 놓아둔다고 한다. 떠오르는 생각들을 그때그때 적어놓기 위해서란다. 휴대폰이 출시되고 노트의 기능이 생기고 나도 생각날 때마다 휴대폰에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적어놓는다. 그렇지 않으면 생각은 휘발되고 내 머리 속에는 부스러기조차 남아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 많던 생각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일까.


  세상이 복잡해서인가,  화를 낼 일이 많아진다. 어디서 제대로 말 한번 못하고 바보 같이 가만히 있는 경우도 있다. 또 엉뚱한 실수를 하고 낯뜨거워 사라지고 싶을 때도 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은 매번 찾아오고 돌아갈 수 없는 것 때문에 빨리 잊혀지길 간절히 바라게 된다. 어제 떠올랐던 문장을 아침에 떠올려보면 기억나지 않는 것처럼 괴로운 기억, 슬픈 기억들도 그렇게 지워지면 안될까.


  매일 아침 일어나면 어제 했던 일을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 어제 누굴 만났는지, 어떤 말을 했는지, 어디에 갔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날 그는 했던 일을 적어두기로 한다. 메멘토라는 영화 속의 레너드 셀비는 지난 10분간만 기억하지만 그는 모든 기억을 쌍그리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기억은 수첩 속에 남아있는 기록들로 채워지고 그의 하루하루도 수첩 속의 글로 채워진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한 자신을 수첩 속에서 보게 된다. 그제는 길을 가다가 침을 뱉어서 길 가는 사람의 구두코에 침이 떨어져 모르는 사람과 주먹질을 하고 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어제는 지하철을 잘못 타서 약속 장소에 늦게 가게 되어 중요한 계약을 놓치게 되었다. 하루하루 그는 실수를 반복했고 그 모든 일은 잊었으면 했던 일이었고 다행히 수첩에 적어놓지 않았더라면 부끄러움의 몫도 남아있지 않았을 터였다. 수첩에 적어놓은 일들이 부끄러운 일로 가득해지자 그는 수첩에 적는 일을 포기한다. 그러자 다시 안개 속과 같은 어제의 일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에 그는 거울 속에 늙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게 된다. 수첩 속에 남아있는 그의 일상은 온통 부끄러운 일 투성이다. 그러자 문득 그는 자신이 특별히 기억할만한 일만 적어놓은 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그러고 보니 오늘 아침에 일어나 처음 맞이하는 푸른 하늘에 대한 기억을 적어놓지 않았던 사실을 깨닫는다. 따뜻한 국의 기억도, 아내가 반듯하게 다림질해놓은 와이셔츠의 기억도, 잘 다녀오라고 말했던 아내의 고단하지만 부드러웠던 미소도, 열심히 걸음을 떼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무엇보다 아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반가웠던 자신의 기쁘고 가볍던 마음을 써놓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늙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이제부터는 꼭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겁고 힘겨운 일이 아닌 가볍지만 소소한 즐거운 기억들을 수첩에 적어보기로 했다. 그러자 그의 수첩엔 적힌 글은 그가 그동안 적어놓았던 것과는 아주 다른 글들로 채워졌다. 무엇보다 한 장을 꽉 채우지 못했던 그의 하루는 사소하지만 행복했던 기억들로 가득차 두 페이지가 넘는 종이에 빽빽한 글로 채워졌다. 그는 거울 속의 늙은 얼굴이 점점 편안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자기가 채워넣은 글로 가득한 공책이 한 권, 두 권 수를 더해가면서 공책을 읽으면 행복으로 가득한 한 남자의 나머지 일생이 적혀 있었다. 


  이야기를 만들고 보니 아침이면 잊어버리는 일이 괜찮은 것도 같다. 어제의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것은 오롯이 나의 몫이니. 이야기 속의 남자처럼 굳이 수첩 속에 자신의 하루를 적어놓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잊혀지는 일들이나 순간 만나는 행복한 기억이나 그리고 그것이 쉽게 잊혀지더라도 우리의 기억이 남고 지워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굳이 불행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미래는 곧 현재가 되고 과거가 되니, 때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일이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있고 아주 사소한 일들이 마지막 순간의 내게 행복을 선사해 줄 수 있는 건 아닐까. 삶이란 게 예상치 못한 복병이 늘 있게 마련이니 어쩌면 나뭇잎 위에 드리워진 햇빛 같은 사소한 것의 소중함을 아는 게 더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생각해보면 화가 날 일이 너무나 많고 상처받은 게 너무나 많지만 내일 아침이면 다 잊혀질 일들일지 모른다. 그리고 내게 다시 시작한 하루의 첫 인상은 햇살 한 줌이고, 한 끼의 따뜻한 밥일지 모르고, 오늘 새로 만나게 될 사람일지 모르고 오늘 처음 듣게 된 아름다운 음악일지 모르고, 오늘 처음으로 느끼게 된 훈훈한 공기일지 모르고, 오늘 처음 깨닫게 된 인생의 깊은 가르침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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