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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성주 Oct 14. 2021

첫 문장

사색하는 우체통

  지난 일주일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며칠 없었다. 비가 오면 창가에 서서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낭만적인 그림을 떠올리는 나이를 지났다. 그런데도 가끔 그런 사진 속의 주인공을 흉내 낸다. 비는 침하, 꺼져 내려앉는다는 느낌과 닿아있다. 마음도 몸도. 오랜 시간 비가 오면 이건 마음의 문제가 아니다. 현실적인 문제가 함께 온다. 마음은 너무 깊이 가라앉아서 우울이 찾아온다. 우울은 안개와 같아서 나를 가둬둔다. 타인과 세상으로부터. 문학이라는 예술의 행위도 오랜 시간 비 맞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된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는 불안한 꿈에서 깨어나 보니 자신이 흉측한 벌레로 변해 있었다./변신 중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모르겠다./이방인 중


  카프카의 변신 첫 문장과 까뮈의 이방인 첫 문장은 충격적이다. 많은 소설가들이 눈길을 끄는, 세계로 이끌어내는 첫 문장을 위해 수많은 문장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무능에 절망하기도 한다. 첫 단어, 첫 문장은 그 작품의 세계로 이끄는 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첫 문장 쓰기로 골머리를 앓는다. 시대를 초월한 뛰어난 작품일수록 첫 문장은 강렬하다.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들을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며!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은 무엇일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그들의 앞 세대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을 믿었듯이,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신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시대에 태어났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에 근거해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신'의 대체물로 '인류'를 선택했다./불안의 책 중


  나는 여섯 살 때 '대자연의 진실'이라는 제목의 원시림에 관한 책에서 기막힌 그림을 하나 본 적이 있다. 그것은 어떤 짐승을 집어삼키고 있는 보아뱀의 그림이었다./어린 왕자 중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홀로 조각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84일 동안 바다에 나갔지만 단 한 마리도 집지 못했다./노인과 바다 중


  소설의 첫 문장 혹은 첫 단락은 작가가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의 단서가 담겨 있거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한 호기심을 끌어내는 상황으로 시작한다. 소설의 첫 문장을 실패한다면 소설 자체가 실패할 경우가 많다. 물론 그렇지 않은 작품들이 더 많지만 긴 글의 호흡을 점점 싫어하고 짧은 글이나 영상을 좋아하는 독자나 관객이 많아지면서 소설은 점점 힘들어진다. 그럼에도 소설을 쓰는 사람은 너무 많다. 올해의 문학동네 신인상 공모에 600명이 넘는 작가의 작품이 1200편 넘게 들어왔다고 한다. 소설이 읽히지 않는 시대에 소설을 쓰는 작가가 넘친다는 아이러니다. 세상은 점점 괴기스럽고 비이성적으로 변해가며 이야기가 힘을 발휘하기보다 현실이 더 뒤틀린 세상에서 이야기에 더 목말라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슬프다. 


  일주일간 내리 흐린 날씨와 비가 반복되면서 나는 박제된 인간처럼 닫힌 공간에서 몇 걸음 옮기지 않고 앉았다 섰다를 반복했다. 부상 입은 곳은 잘 낫지 않고 가라앉기만 하는 마음도 떠오를 줄 모른다. 그럼에도 이야기에 꽂혀 다시 컴퓨터 앞에 앉는다. 커피의 뜨거움은 식고 향기만 코끝에 남아 있는데 첫 문장 쓰기를 시도한다. 역시 첫 문장은 너무 어렵다. 내가 쓰려는 건 무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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