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우체통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을 읽고

by 이성주

독서일기 18


1 우리의 시간


얼마 전에 이란 영화 한 편을 봤다. “당신의 세상은 지금 몇 시입니까?”라는 제목의 영화였다. 우리가 보내는 시간은 지금 공평하게 현재에 머물러 있을까.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 한 장의 사진 때문에 프랑스에 머물렀던 골리는 20년 만에 고향인 이란 북부의 마을 라슈트로 돌아오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파하드로 인해 혼란스럽기만 하다. 고향을 떠나고 파리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을 한 골리의 기억 속에 파하드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과거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파하드는 그녀가 오랫동안 찾아뵙지 않았던 그녀의 어머니와의 기억조차 고스란히 갖고 있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파하드로 인해서 기억을 찾아가는 골리는 현재에서 과거의 시간을 끄집어내고 과거라는 시간 속에 갇혀있던 파하드는 현재에서 기억의 퍼즐을 찾아가는 골리에게 조각조각을 맞춰준다. 그리고 파하드는 골 리가자신을 부르는 ‘멍청씨’라는 호칭을 들으며 피곤한 몸을 누인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라는 시간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시간을 기록하는 것은 우리 뇌에 저장하는 기억이다. 물리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것은 실제로는 편의상 숫자로 표시된 것이고 그것은 태양이 지구에게 빛을 주는 기간 동안 그 움직임의 결과로 측정해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 개념으로 바꾼 것이다. 결국 시간은 각자의 기억 속에서 살아있고 그 기억의 정확성이나 구체적 내용은 각자가 저장한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그래서 시간은 우리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만 결과는 전혀 다르고 기억 또 한 다르게 저장된다. 심지어 주어진 시간을 우리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결과 역시 확연한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똑같은 시간이 주어지지만 서로 다른 결말을 도출해내는 우리들의 삶, 그리고 죽음 앞에서 기록된 시간을 끄집어냈을 때 우리는 각자가 다른 시간을 보내왔다는 사실 앞에서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


2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속의 9편의 단편 소설은 우리가 살아왔던 혹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이며 기억들이다. 그리고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쐐기풀 p249) 그중 타이틀 제목으로 선택된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은 조해너라는 여성(버림받고 누군가의 주목을 받지 못했던 불행한 기억만이 존재하는)의 사랑과 선택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과정에는 그 둘을 이어주는 젊은 이디스, 새비서의 장난같은 놀이가 있다. 켄 부드로가 쓰지 않은 편지, 그리고 그것을 읽고 자신이 평생 벌어 모은 돈과 자신이 일했던 주인집의 가구를 갖고 이사하기까지, 무모하고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은 어떤 결과를 향해 가는지 소설 속 인물들은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의도하지 않았던 행위들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삶은 예측할 수 없지만 신의 뜻 안에서 벌어지는 기적 같은 일들의 결과를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결과를 얻어낸 것은 조해너의 용기와 지혜, 사람을 대하는 진정성에 있다. 켄 부드로가 그녀의 가방 속에서 발견한 통장으로 결혼까지 결심하게 만들었겠지만 결론적으로 조해너는 자신이 멕컬리의 집을 떠난 목적을 달성한다. 사람들에겐 가슴에 늘 바라는게 있다. 변화, 그러나 그 변화가 가져오는 결과도 또 그 변화를 유발하는 것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은 사이에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벌어진다.


뭔가 새로운 변화를 내부로부터 감지할 수 있었다. 바로 이게 내게 필요한 변화였어. 그는 전에도 늘 이런 말을 하곤 햇지만, 이번에야말로 이 말이 진실임이 입증될 것 같았다. 따뜻한 겨울, 상록수 숲의 향기와 익어가는 사과들. 가정을 꾸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 p75


어쩌면 이 변화를 가장 바라고 있었던 것은 조해너였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것을 현실로 옮긴 것은 그녀 자신이었고. 또 그 과정에 그녀를 움직이게 한 것은 진지한 무엇이 아니라 사춘기 아이들의 호기심과 장난, 자신이 속한 곳을 벗어나고자 했던 욕구 등이 어울려 빚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그 결과를 만들었던 과거의 치기어린 시기의 기억들에 대해 이디스는 “알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안된다…….”고 노트에 적는다. 그리고 마지막 줄에 적어놓은 “내 앞에 그리고 너의 앞에 어떤 운명이 가로놓여 있는지를…….”라고 마무리한다. 우리가 어떻게 알까. 신의 뜻을.


3 우리가 기억하는 것들 그리고 삶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교집합으로 공유하고 있는 기억이 많은 관계일수록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마도 부부가 그런 관계가 아닐까. ‘곰이 산을 넘어오다’는 오랜 부부였던 피오나와 그랜트의 이야기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피오나가 요양병원에 입원하면서 그랜트는 과거에 많은 여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자신의 과거를 떠올린다. 피오나가 아는지 모르는지, 다행히도 부부관계는 유지되었지만 결국은 대학의 자리에서도 물러나고 병원에 있는 피오나를 방문하면서 그랜트는 묘한 감정에 빠져든다. 병원에서 만난 오브리에게 집중하는 피오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랜트는 자기가 저지른 과거의 과오를 벌주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피오나가 더욱 오브리에게 집중하는 것은 아닐까 오해하기도 하지만 병원을 떠난 오브리를 그리워하는 피오나를 보며 그랜트는 오브리를 그녀에게 데려오기 위해 오브리의 아내에게 부탁한다. 그러나 병원을 방문한 그랜트를 보며 피오나가 말한다.


“그냥 가버린줄 알았어요. 나 따위는 신경쓰지 않고. 버려두고 간줄 알았죠. 버리고, 나를 잊어버리고.” 그녀가 말했다. 그랜트는 그녀의 하얀 머리카락 분홍빛 속살, 사랑스러운 두상에 얼굴을 기댔다. “그런 적은 없어. 단 일 분도.” 그가 대답했다.p437


아내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겨준 그랜트는 그가 여전히 아내 피오나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녀가 그를 영원히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함께 갖는다. 아내가 기억을 잃어가는 순간에 그랜트는 자신이 그간 벌였던 많은 일들에 대한 기억 하나하나를 끄집어낸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시간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고 과거를 끄집어내는 그랜트에겐 시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영화 골리와 파하드가 각자의 시간을 보내는 방식에서 한 사람, 골리가 현재를 살아가며 현재 태양력의 시간을 읽고 있다면 파하드는 과거라는 시간에 갇혀서 골리를 그리워하며 현재를 끊임없이 과거로 끌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둘이 만나는 시간에 환타지가 있다면 ‘곰이 산을 넘어오다’에서 그랜트는 과거의 시간에 점점 갇히게 되고 피오나는 현재라는 시간에 머문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기억이라는 기제로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피오나에게 과거는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것은 그녀의 마지막 말, 그랜트인지 오브리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말에서 그녀의 단순한 기억 혹은 시간이 우리 삶에 얼마나 많은 영향력과 파괴력을 지녔는지 새삼 깨닫는다. 그것은 현재를 살아간다고 착각하지만 끊임없이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회상하는 평범한 보통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그랜트가 그러는 것처럼. 우린 시간을 기억 속에 담아 저장한다. 우리의 시간은 매일 뜨는 태양으로 그리고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돌면서 시간을 만들지만 그것은 우리가 편의를 통해 만든 것이지 실은 우리의 시간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그 과거의 기억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 삶의 영원한 숙제다. 우리는 지금도 기억이라는, 시간을 저장하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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