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필기구를 좋아해요. 가볍고 편한 볼펜을 좋아해서 그런 것들은 한 다스씩 사놓고 쓰는 편입니다. 여행지에서는 연필과 북마커 그리고 볼펜류를 사곤해요. 또 공책도 좋아하구요. 그러다보니 공책들마다 책에서 읽은 구절이 적혀있거나 짧은 단상이 적혀있죠. 그 모든 걸 버리지 못하니 어쩔 때는 책꽂이 한 칸이 공책으로 가득찰 정도예요. 다 쓴 공책도 있고 몇 장 쓰지 않은 공책도 있고 새 공책도 있어요. 또 어쩔 땐 사다놓고 아무렇게나 꽂아놔 숨바꼭질 하듯이 꼭꼭 숨어 있기도 해요. 한번씩 책장 정리를 하다 보면 잊혀진 공책들이 나오거나 쓰다만 일기들이 나옵니다. 쓰지 않은 공책은 또 새로운 글로 채워질 것이고 이미 쓴 공책은 지나간 시간의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거의 대부분은 편안한 상태에서 쓴 글들은 아닙니다. 격정적인 상태에서 쓴 글들이 많아요. 그 안에는 주로 슬픔과 비애가 많은 걸 발견합니다. 왜 나는 기쁠 때는 쓰지 않고 슬프고 힘들 때 글을 쓸까 생각해 보면 아마 기쁨은 그 자체로 충분히 표현되기 쉽기 때문에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나간 시간들을 기억하는 방식엔 내가 기록하지 않은 것들과 기록한 것들, 타인의 기억에 의존합니다. 주로 내가 기억하는 것들은 부정적인 감정일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타인이 기억하는 것들은 그래도 내게 좋은 일들을 많이 기억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때 나는 참 힘들었어'라는 말에 '그래도 그런 좋은 일이 있었잖아'라고 친구들은 좋은 기억을 짚어줍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많이 있긴 합니다. 그것들을 모으니 온전한 나의 시간들이 줄을 서서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때 내가 좋아하는 필기구들은 그들의 역할을 충실히 담당하고 있는 거겠죠. 손에 쥐고 쓰는 필기구는 무게를 느끼게 하거나 힘이 들어가면 오래 쓸 수가 없습니다. 공책은 너무 뻣뻣해도 너무 얇아도 너무 두꺼워도 쓰기가 힘이 듭니다. 볼펜에 적절한 힘을 가해 써도 부드럽게 써지는 공책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갖고 다니다 어떤 단상이 떠오르면 무엇인가를 꼭 쓰게 하지요. 핸드폰의 메모장기능이 이럴 때는 무용지물입니다. 비뚤비뚤 못 쓴 글이지만 내 힘으로 쓴 글은 내 감정이 더 진솔해 보입니다. 어쩌면 손편지가 귀하게 대접받는 이치와 같은 거겠죠. 나는 오늘도 책에서 읽은 부분 중 감명깊었던 부분 몇 구절을 공책에 옮겨적었습니다.
분개하지 않는다. 분개는 힘 있는 자들이나 하는 것이니까. 체념하지 않는다. 체념은 고귀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니까. 침묵하지 않는다. 침묵은 위대한 자들이나 하는 것이니까. 나는 힘있는 자도, 고귀한 자도, 위대한 자도 아니다. 나는 고통스러워하고 꿈을 꾸는 사람이다. 나는 나약한 자라서 그저 불평만 한다. 나는 예술가라서 나의 불평으로 노래를 만들며 놀고, 내 꿈들을 더 아름다워 보이도록 배열하며 논다.p168/불안의 책/페르난두 페소아
그러고 보니 내가 쓴 단상들이 모두 불평과 고통인 이유를 알 것도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