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할머니는 무당이셨다. 동부이촌동에 일본식 가옥이 몇 개 있고, 한강 이북의 동네라는 의미 이상이 아니었을 때 그 동네에서 할머니는 아주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났다. 그리고 먹을 게 없어서 이집 저집 식모로 다녔고 어쩌다가 미군 기지에 미군을 상대로 접대하는 여성이 되었다. 할머니는 미군 기지에서 일했을 때의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시다가 말곤 했다. 살아계셨다면 그때 하고 싶었던 말이 뭐냐고 물었을까? 거의 매주 할머니를 찾아뵈었지만 끝내 묻지 못했던 질문을 나는 결국 하지 못할 거였다.
동두천의 몽키하우스/ 성병검사 후 그녀들은 이곳에 감금되었다
할머니의 주검을 발견한 건 그일(죽음) 이후 며칠이 지나서였다. 할머니의 혈육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못했다. 할머니는 방문할 때마다 한국 야쿠르트의 아이보리색 야쿠르트 한 개를 권했다. 일주일에 한번 보건소에서 오시는 아주머니가 먹을 것과 안부를 묻는다는 말을 해주었고 장판지 밑에 돈이 조금 있다는 말을 하곤 했다. 나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있는 삼십 여분을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무슨 이야길 했는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기억이 없다. 나는 할머니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했던 시간이 실재하는 순간인지 알 수가 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 단숨에 평택으로 내려갔다. 평택시에서 무연고 사망자 처리에 대한 이야기에 할머니의 삶이 어느 한 순간도 평범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불행의 일상화, 할머니에게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을까. 그런데 내게 남은 할머니의 사진은 너무나 평화롭다. 웃으며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린 할머니의 모습은 그악스럽게 살아 얼굴에 잔뜩 욕망과 욕심이 담아있는 얼굴이 아니다. 더 살고 싶어하는 그런 기본적인 욕구를 담지 않은 얼굴이다. 내 카메라에 담긴 몇 장의 사진에서 골라 할머니의 영정을 만들고 빈소에 처음 차려진 초물상은 소박하니 발인 때까지 그대로 유지된 채 곧 치워졌다. 할머니에게 나는 약속을 했다. 팔찌를 만들어드리겠다고. 할머니는 아주 짧은 시간 화장으로 이 세상에서의 흔적을 정리했다. 돌아가신 분이 어찌 능동적으로 그리 했겠냐마는 나는 할머니가 이미 당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을 거란 생각을 한다. 어느 순간부터 보여준 할머니 얼굴의 편안함이 그 증거이지 않을까. 할머니 납골당에 내가 만든 체리빛의 원석 팔찌를 넣어드렸다. 빈손으로 오셨으니 가실 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나는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아마도 평택의 납골당 안에 그 팔찌는 선연한 핏빛으로 어둠 속에서 반짝일지 모를 일이다.
그녀들도 꿈이 있었다
미군 위안부, 할머니가 살며 들었던 이름은 이것이 아니다. 양색시, 양갈보, 그보다 더한 이름으로 불리워졌을
것이다. 돈을 벌어 가족에게 보내고 미군과 살며 조금은 행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할머니들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물어보면 그래도 미군과 살림을 살 때라는 대답을 하셨다.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고 사랑받는 느낌을 가졌던 아주 짧은 시간들, 그외의 시간엔 버림받거나 학대받거나 손가락질 당했다고 했다. 미군 병사에게 살해당하고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된 윤금이와는 다른 삶을 살았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까. 여할머니는 내가 평택에 다니던 동안 가장 특별한 인연이었다. 스냅으로 찍은 할머니의 사진을 시작으로 나는 평택의 할머니들 사진을 찍기 시작했고 그 중 몇 명의 영정 사진을 만들어드렸고 그 중 몇 명의 사진은 '보통이름 숙자'라는 이름의 사진 기획전에 전시되었다. 장이모와 김이모의 사진과 몽키하우스, 아메리카타운 등을 찍으며 역사 속에서 폭력으로 남겨진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기획전은 의도하지 않게 축소되어 반향 없이 끝나고 말았지만 그 기록의 가치가 박이모의 죽음으로 다시 크게 와닿는다.
용주골
할머니들의 사진을 그후 젊은 사진작가가 찍고 있지만 나는 그와 내 시선이 분명 다르다는 걸 안다. 내가 찍은 사진은 어쩌면 사진적 기교는 부족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후에도 그녀들이 살아왔던 시간이 담긴 내 사진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나만이 갖고 있는 가치가 있다. 그녀들이 이 세상에 남아있지 않을 때 그것은 온전히 시대를 몸으로 겪은 여성들의 역사로 남을 것이다. 다만 소원이 있다면 다시 그녀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여성으로 그녀들에게 공감하며 보낸 시간이 녹아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