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우릴 붙잡는 거야

영화 '보이후드'를 보고

by 이성주

지나간 시간을 돌이켜보면 아팠던 기억보다 즐거웠던 기억을 더 끄집어내게 된다. 굳이 타인에게 아프고 고통스러웠던 기억들을 말할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다. 찌질하고 부족하고 우울했던 기억이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지나간 시간들이 내 필요에 의해서 아름답게 윤색되거나 변질되기도 한다. 나의 우울했던 기억들은 저 깊은 곳에 숨겨져있다. 그렇지만 나의 말과 행동, 현재의 삶의 태도에서 그런 것들이 과연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할까.


소년 메이슨은 돌싱 엄마 올리비아의 손에서 자란다. 누나 사만다와 함께. 똑똑한 누나는 감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메이슨과 찐남매의 정석을 보여준다. 말이 없는 동생을 말이 늦은 거로, 자신의 세계에 빠져있는 동생을 놀리며 교묘하게 엄마에겐 동생이 자신을 괴롭힌다고 고자질하기도 하는. 메이슨의 시선으로 영화는 전개되지만 사실은 엄마의 삶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한다. 이른 나이에 피임을 제대로 하지 못해 결혼에 이르게 된 메이슨의 엄마, 아빠는 이성을 사귈 때 피임은 필수라는 그들 인생을 답습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끊임없이 잔소리처럼 자식들에게 전해진다. 제대로 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엄마와 아빠는 그런 점에서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엄마 올리비아는 외벌이 가장으로 두 아이를 대학까지 보내고 자신도 석사학위까지 취득해 교수가 되기까지 최선을 다한 인물이다. 과정에서 알콜 중독 남자들과 결혼하고 이혼하는 과정을 반복하지만 엄마는 똑똑한 용기있는 여성이다.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서도 본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알콜의존증 남편의 폭력을 피해 바로 집을 떠나고 이혼을 반복하면서도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며 메이슨과 누나가 대학을 가기까지 당연한 결과인지 모른다. 실제 미국에서 대학까지 교육을 마치는 사람이 50프로가 안된다는 걸 보면 메이슨의 엄마는 훌륭하다. 그렇지만 메이슨에겐 엄마의 반복되는 결혼과 이혼이 그를 더욱 더 침울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는지 모른다. 직접적으로 올리비아에게 그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메이슨의 무기력해 보이는 모습은 부모의 이혼으로 빚어진 잦은 이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자유로운 영혼인 아버지 메이슨 시니어는 여러모로 메이슨주니어의 예술적 감수성의 유전자를 물려준 인물이다. 그가 경제적으로 무능했거나 몽상가적 기질을 보였는지 모르겠으나 영화에서 보여준 아빠는 아이들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는 좋은 아버지였다. 자식과 부모가 나누는 진짜 대화가 무엇인지, 자신의 실수에서 터득한 지혜를 아이들에게 전해주려는 행위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와 시간을 내주지 않는 아빠들에게 경제적 여유만이 아버지의 역할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를 보다 올리비아의 하나같이 한심한 남편들을 보고 있으면 올리비아라는 여자가 결혼에 맞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쩌면 이건 편견일지도 모르겠지만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올리비아의 선택이 매번 실패한 결혼으로 귀결된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아들 메이슨이 자신의 품을 떠날 때 그녀의 대사는 눈물이 쏙 나올만큼 가슴을 울린다.


'오늘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야.

떠날 건 알았지만 이렇게 신이나서 갈 줄은 몰랐다.'

'신나는 건 아니에요. 그럼 울까요?'

'결국 내 인생은 이렇게 끝나는 거야.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결혼하고 애 낳고 이혼하면서 네가 난독증일까 애태웠던 일, 처음 자전거를 가르쳤던 추억, 그 뒤로 또 이혼하고 석사 학위 따고 원하던 교수가 되고 사만다를 대학에 보내고. 이젠 뭐가 남았는지 알아? 내 장례식만 남았어.'

'뭐하러 40년의 시간을 당겨서 걱정을 해요?'

'난 그냥 뭔가 더 있을 줄 알았어.'


자식이 품을 벗어나 자신의 둥지로 날아갈 때 남아있는 엄마가 겪는 빈둥지증후군을 올리비아는 겪지 않을 줄 알았지만 그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열하며 말하지만 메이슨이 하는 말처럼 자식이 완전히 떠나는 것이 아니고 그녀도 바로 죽는 것이 아니니 그녀의 행위는 사실 지나치다. 그럼에도 자식을 키운 부모는 절대적으로 그녀의 감정에 공감한다. 내 손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 그동안 삶을 버텨준 나무와도 같은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잃는 것 같은 상실감을 자녀들은 아마 알 수가 없을 것이다.


감독인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영화를 찍기 전 배우들에게 12년간의 촬영스케줄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영화다큐, 배우가 성장하는 과정을 우리도 영화를 통해 보지만 영화의 스토리는 픽션이니 영화를 보는내내 참 묘한 감정이 든다. 엄마 올리비아와 아버지 메이슨이 늙어가는 과정이 성장하는 메이슨과 사만다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아마도 배우가 12년간 연기하지 않았더라면 이 영화는 뻔한 이야기를 하는 그저그런 영화로 그쳤을지 모른다. '보이후드' 단순히 한 사람의 12년간의 인생 여정이지만 그 기간의 삶은 메이슨의 전 생애에 영향을 끼칠 것이다. 또 올리비아라는 사람의 전 생애를 본 것 같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메이슨은 참 운이 좋은 아이라는 생각이 든다. 최선을 다해 사는 엄마와 똑똑한 누나, 감수성이라는 유전자를 물려준 아버지, 좋은 이웃을 두었으니.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메이슨의 예술적 재능을 꽃 피울 수 있게 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난 재능있는 사람을 많이 봐왔다. 노력과 성실함과 직업윤리없이 그들 중 몇 명이나 프로로 성공할까. 그 답은 두 손가락으로 답할 수 있지. 제로. 넌 성공 못해. 메이슨. 경쟁은 치열해. 이 세상엔 노력하는 천재도 많고 비록 재능은 없지만 열심인 사람도 많아. 지금 저 교실에도 그런 애들 수두룩해.'


그렇다. 세상엔 재능있는 사람은 수두룩하고 게다가 노력하고 자신의 재능을 즐기며 열심인 사람까지 많다. 무책임과 무기력에 빠져있는 메이슨에게 충고하는 선생님이 있었다는 점에서도 메이슨은 분명 복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자란 메이슨은 보다 깊이 있게 세상을 바라볼 것이다. 영화 말미에 대학에서 만난 새 친구와 나누는 대사는 이 영화의 말미로 참 인상적이었다.


'흔히 이런 말들을 하지. 이 순간을 붙잡으라고. 난 그 말을 거꾸로 해야 될 거 같아. 이 순간이 우릴 붙잡는 거지.'

'그래. 무슨 말인지 알아. 시간은 영원한 거지. 순간이라는 건 늘 바로 지금을 말하는 거잖아.'


영화가 끝나고서도 여운이 오래 남았다. 개봉했을 때 무심코 봤던 장면들도 다시 눈에 들어온다. 영화를 두번, 세번 보는 거가 이래서 좋은 거 같다. 영화 ost도 탁월하다.


'날 보내줘요.

당신만의 영웅이 되긴 싫어요. 당신만을 위해 살 순 없어요. 세상과 맞서 싸워보고 싶어요. 당신의 가면 놀이, 당신의 퍼레이드에 발 맞추기 싫어요. 이젠 다른 누군가와 함께 걸어보고 싶어요. 돈을 벌어서 여자 친구도 만나고 새 기타도 사고 그녀와 주말을 함께 보내고 서로의 귓가에 미래의 꿈을 속삭일 수도 있겠죠.

그녀는 내가 지켜주길 원하겠죠. 하지만 나는 평범한 녀석에 불과해요. 그러니 날 보내줘요.'


최선을 다해서 자식을 키웠으니 마음을 다해 자식을 보내주고 그들의 인생을 살게 해주는 것이 부모가 자식을 위한 마지막 사랑이다. 그런데도 보내지도 떠나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넘쳐나고 있으니 세상이 이렇게 해결이 어렵게 되어가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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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영화 포토에서 빌려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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