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져 내리다'를 읽고

책 읽는 우체통

by 이성주

"물론 모든 삶은 무너져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늙는다는 것은 육체의 무너짐을 시작으로 해서 삶에서 이룩해놨던 많은 것들을 놓아버리고 그것들이 무너지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실제로는 세대가 바뀌는 것이지만 지극히 많은 업적을 세웠던 사람들 입장에서는 명성이 무너지고 능력이 무너지는 과정을 고스란히 견뎌내야 하는 시기이다. 자신이 이뤘던 것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는 것을 봐야하고 내려놓고 가야 할 것들을 누군가 앗아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마음은 수습 가능할 정도이고 남이 말하듯 그렇게 무너진 게 아닌데도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기억력도 육체의 반사신경도 반짝이는 지혜와 유머도 사라져가는 게 사실이다. 성공했던 사람은 그래서 어쩌면 더 불행한지 모르겠다. 손에 쥐었던 것이 많을수록 손의 허전함을 견뎌내지 못할 테니까. 이소노미아에서 나온 '무너져 내리다'는 피츠제랄드의 말년의 에세이와 그의 수 많은 단편 중 6편을 묶은 책이다. 이 책에 손이 간 것은 순전히 책페이지마다 푸른, 측면 전체를 채운 푸른색 때문이다. 1쇄 이후에는 이 푸른색이 빠진다고 하니 다행히도 푸른책이 내게 남았다.


총 6편의 단편은 그의 걸작인 '위대한 개츠비'와 상당히 비슷하다. 대도시의 성공한 삶을 동경하는 인물과 그 인물의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혹은 잘생긴 이기적인 이성, 그리고 거기에 적응하거나 그렇지 못한 인물들의 이야기다. 대공황의 시기, 전쟁이 지나갔고 곧 전쟁을 맞이했던 시대에 더 화려하고 더 소비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코로나라는 위기에서 부유한 사람들은 더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소비하는 지금과 많이 비슷하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야 시대를 막론하고 자본주의의 날개를 달고 함께 성장했으니 여전히 유효한 욕망이고. 그의 에세이 속에서는 성공해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 '당신이 꽤 괜찮은 사람이라면 인생은 얼마든지 당신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지성과 노력, 혹은 그 두 가지가 적당히 뒤섞인 것에 쉽사리 굴복하곤 했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서 거의 100년이 흐른 지금 그 말은 젊은이들, 꽤 괜찮은 젊은이들에게 절망을 선사한다. 그는 늙고 더이상 자신의 재능이 예전 같지 않을 때 느꼈을 감정들을 지금의 젊은이는 꽤 괜찮고 지성과 노력도 적당히 뒤섞이고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는데도 실패를 거듭할 수 있으며 무너져 내리는 감정을 느낀다. 물론 그가 집안의 경제를 책임져야 했었던 가장이라는 점에서 공감을 할 수 있을 거 같지만 그럼에도 그는 성공한 대법관의 딸과 결혼까지 하고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기도 하지 않았던가. 책 부록으로 편집 후일담에 담긴 두 사람의 대담에도 실린 것처럼 그의 에세이 '무너져 내리다'는 독자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글이 아니다. 오만한 재능있는 사람의 넋두리로 읽힌다. 작가에게는 어쩌면 위안이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단편은 재미있다. 그의 문장과 시대를 읽는 젊은 사람들의 욕망, 그리고 그것이 어느 정도 이뤄졌을 때 오게 되는 허망함이라니, 이거 좀 비슷하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위대한 갯츠비'에서 느꼈던 감상이다.


6편의 단편 중에 '겨울꿈'은 위대한 갯츠비의 단편으로 읽혀도 무방할 정도로 기시감이 든다. 덱스터는 갯츠비와 비슷하고 주디 존스는 데이지와 이미지가 겹친다. 이는 뒤에 언급된 대로 단편인 '겨울꿈'이 먼저 써진 것이고 그 후에 '위대한 갯츠비'가 완성됐다고 하니 독서를 하며 느낀 기시감은 어쩌면 당연한 건지 모르겠다. 내가 인상적으로 읽은 건 '머리와 어깨'였다. 천재이며 지적인 호레이스가 마샤를 만나 삶이라는 현실에 부딪쳐 둘의 위치 '머리와 어깨'가 바뀐 것이 아이러니하면서도 즐겁게 읽혀졌다. 갯츠비에서 데이지가 갯츠비의 마음을 사로잡고 오랫동안 그에게 단 하나의 여자로 살았던 것처럼 6편의 단편 속의 여성들은 주체적이면서도 매력적이다. 여성의 지위가 낮았을 때 여성이 가지는 가장 큰 무기는 성공한 남자를 유혹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성공하기가 어려울 때 가장 쉬운 방법이었으니까. 게다가 아름답기까지 하다면 굳이 어렵게 돌아갈 필요가 없으니까. 아름다움이란 것이 쉽게 쇠잔하는 것이니 진정한 힘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소설 속에서 인물이 바라는 것은 실제로는 사회적 성공이나 명성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또 '버니스 단발로 자르다' 역시 자신의 주체적인 생각 없이 매력적인 인물로 변신하려다 단발로 머리를 자르게 되자 격분하여 자신의 갖고 놀았다고 생각한 마저리의 머리를 자르고 집을 나가는 버니스에게서 유머를 발견한다. 그녀의 화가 오히려 유머로 읽혀지는 건 이 소설이 써진 시대가 지금과 매우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야, 우리 둘을 각각 머리와 어깨라고 부르는 게 어때?" 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 "그리고 머리가 제 역할을 할 때까지 어깨가 조금만 더 흔들기로 하는 거야."/머리와 어깨 중


"넌 울지 않을 거야." 누군가가 큰소리로 말했다. "결코 다시는 울지 않을 거야. 눈물은 그저 얼어버릴 뿐. 여기선 눈물도 다 얼어버리지."/얼음궁전 중


무엇이든 마흔을 넘긴 사람을 영원히 설득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다. 열여닯 살에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모습 그대로 믿어버리지만, 마흔 다섯살에는 그 안에 들어가 숨어버리니까./버니스 단발로 자르다 중


그는 눈부신 것들, 눈부신 사람들과 친밀해지기를 원한 게 아니었다. 그는 눈부신 것 자체를 원했다. 종종 그는 왜 최고를 원하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갖기 위해 손을 뻗었다./겨울꿈 중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시들어가죠. " 데블린은 손가락을 튕기면서 말했다. "그런 일들을 많이 봤을 겁니다. 아마도 결혼식에서 그녀가 얼마나 예뻤는지를 잊어버렸던 것 같아요. 그 이후로 자주 그녀를 봤으니까. 멋진 눈매를 가진 여자죠."

문은 닫혔고 해는 저물었다.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지금껏 버텨낸 강철 같은 음울한 아름다움만이 남았다. 그가 품었을 슬픔마저도 환상의 세계, 젊음의 세계, 풍요로운 삶의 세계 속에 남겨지게 되었다. 거기가 바로 그의 겨울 꿈들이 활짝 피어났던 것이었다. "오래 전" 그가 말했다. "오래전에 내게 있던 뭔가가 이제는 사라져버렸어. 그게 사라졌으니, 없어졌으니, 이제 울 수도 없군. 신경쓸 수도 없어. 더이상 돌아오지 않을테니."

/겨울꿈 중


그는 문득 '소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허공에 덧없이 사라지는 소멸, 있음에서 없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그 짧은 밤 시간동안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는 모든 행동이 얼마나 대단한 노력이며, 만취로 점점 더 느려지는 행동에 대한 대가는 또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45세의 젊은 나이에 알콜중독에 의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피츠제랄드는 소설 속 남주인공들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격동의 시대에 부자인 외가의 도움으로 어려움 없이 자랐을 피츠제랄드는 유약하면서도 욕망이 많은 젊은이들의 물질과 향략에 빠지기 쉬운 기질을 소설에 그대로 녹여낸 것이다. '위대하 갯츠비'를 읽은 독자라면 가볍게 읽어보길 권하고 피츠제랄드의 책을 읽지 못한 독자라면 재즈시대의 문학을 제대로 구가한 그의 단편집인 이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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