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하는 우체통
예술은 무언가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예술은 그 자체로 무언가이기도 하다. 예술은 세상 속에 있는 어떤 것이지, 그저 세상에 관해 말해주는 텍스트나 논평은 아니다./해석에 반대하다 중(수잔 손탁)
예술가를 대하거나 예술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흔히 그들이 꽤 고상한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래서 가끔 예술가의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라고도 한다. 고상한 사람이 돈을 이야기하면 속물처럼 보이니까. 성공한 예술가를 보면 그들의 업적을 치하하고 그들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그래서 젊은 예술가는 끊임없이 생겨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 젊은 예술가들은 죽어가기도 한다. 다행히 사후에 그들의 작품이 인정받는다면 그나마 그건 축복이다. 무수히 파묻히는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들, 또 젊음을 탕진하고 사라지는 늙은 예술가들이 세상엔 널리고 널렸다.
나는 예술가를 꿈꾸지 않았다. 다만 예술이라고 할만한 것들을 좋아했다. 어릴 때는 그림을 좋아했다. 순정만화를 보고 따라그리다 보니 내가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잘 그리는 것 같았디. 아버지가 철하지 않은 달력을 가져다줘서 흰 백지에 그림을 그렸다. 아트지는 너무 미끄럽기도 했고 너무 두껍기도 했지만 나는 그 종이에 많은 그림을 그렸다. 이야기가 있는 만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한 반에 나보다 만화를 더 근사하게 잘 그리고 스토리를 잘 짜는 친구가 있어 처음으로 좌절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책을 좀 더 읽기 시작했고 마침 학교 국어 선생님이 소설가(지금은 너무나도 유명한 소설가)여서 나는 글쓰기를 시도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친구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 이름을 a4 한 장에 주욱 나열해서 적어보기도 했다. 작가는 다양한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해서 스크린 잡지를 보기도 하고 소설주니어를 구독하기도 했다. 드디어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던 글을 고등학교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친구는 국문과로 진학해 담당교수님에게 나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내 글을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다. 늘 나보다 잘 쓰고 나보다 잘 그리고 뭐든지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세상이었다.
사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글도 쓰고 싶었고 그림도 그리고 싶었고 연극영화과에 가서 배우도 되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은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일이었는데 정작 나는 나를 어떻게 잘 드러내는지 잘 몰랐다. 또 매번 그 기회 앞에서 능력이 부족해서 좌절하기도 했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노력을 덜 했다. 적당히 취미로 이것저것 하면서 내게 남은 건 여전히 그걸 하고 싶다는 내 마음이 남았고 실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직업으로 하는 친구들이 남았다. 등단하려는 사람, 등단한 사람, 사진을 찍어 전시를 했던 사람, 여전히 사진을 찍기만 하는 사람, 배우로 활동하며 무대에 서고자 하는 사람, 이제는 유명해진 사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영역에서 한 단계 관문을 통과한 사람들 중에는 자기 영역에서 조금씩 지평을 넓혀가며 무명의 설움을 극복하고 유명해지는 단계에 있는 사람도 있고 여전히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너무 유명한 사람은 내 주변에 없으니 높은 단계로 올라가기 위해 애쓰는 그들은 높은 노동 강도에 비해 터무니 없이 낮은 노동에 대한 수고비에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서 고민하는 걸 본다. 인정받는 과정을 거치지 못한 나는 그들의 그 고민조차 사실 부럽기만 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들에게 아무 말을 하지 못한다. 그들이 하는 수고를 옆에서 봐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처절하게 순간순간을 보내고 있는지.
예술에 값을 매기는 것은 저열한 행동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예술 장르 중 하나를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들에겐 그것이 생계의 문제이다. 하루에 세 시간씩 자고 글을 쓰고 생계를 위해 일하는 많은 작가 지망생들을 본다. 한 작품을 백 번씩 고치고 자기가 쓴 글에 빼곡하게 퇴고의 흔적이 남은 걸 본다. 그들의 노력과 수고를 보면서 고개 숙이게 된다. 내가 얼마나 게으른지 내가 얼마나 작업하는 걸 쉽게 생각했는지 반성하게 된다. 저녁에 무대에 오르기 위해 낮에 아르바이트 하는 배우들은 얼마나 많은지. 청탁받지 못하는 원고를 쓰고 고치고를 얼마나 반복하는지. 본심에 올랐지만 최종심에 떨어져 다시 공모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 열정에 비해 그들이 이룬 성과는 소소할지 모르겠지만 그들도 예술을 하는 예술인이다. 하지만 그들이 인정받기까지 너무도 험난한 여정을 보내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공하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스카 여우 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님 말씀처럼 운이 조금 더 있을 뿐이다. 예술을 하는 작가가 그들의 작업을 세상에 내놓아 인정을 받은 것은 그들의 예술 작품이 드러나지 않은 것보다 더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예술 작품이 세상에 먼저 인정받은 것이다. 그저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들의 작업이 열등해서가 아니다. 그들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도전하고 있다. 그들의 도전이 인정받고 그들의 수고가 생계가 될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학교 다녔던 1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오면 그에 따르는 보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부를 축적한 세대가 있었다. 또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토록 노력하고 애써도 보상받지 못하는 예술가들은 여전히 너무나 많다. 우리는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많은 예술가들을 알지 못한다. 뛰어난 것만 인정받지만 사실 꼭 뛰어나지 않은 것들도 많다.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지만 사실 꼭 그들이 부족한 예술가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을 세상으로 끌어내기가 어렵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래서 오늘도 자기 작품을 어루만지며 '언젠가'를 예약하는 예술가들에게 박수를 치고 싶다. 그들 작품이, 그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세상과 만나는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또 그들 작품에 매겨지는 가격이 그만큼의 적절한 보상을 받길, 그들이 무대에 서거나 할 때 개런티가 조금 더 높아지기를, 적어도 생계를 걱정하며 죽어가는 예술가가 없길. 노래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책을 읽는 사람이 많아지고 무대에서 자신의 울분을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이 많아지고 그림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지금보다 세상이 조금 더 나아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