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지 않았던 이민 정착이야기 1
알람 소리에 몸을 일으켜 외출 준비를 하는데, 집 안의 전자시계들이 모두 오전 3시 34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밤중에 정전이 있었나 보다.
창밖을 보니 나무 가지들이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이 센 날이구나.
자동차 엔진오일을 교체하러 차를 맡기고, 근처 쇼핑센터까지 걷는 동안 바람은 생각보다 약했지만
이 지역 특유의 싸늘한 체감 온도는 이상하게도 과거의 한 순간을 떠올리게 했다.
그날도 이랬었다.
캐나다에서 처음으로 직장을 구하고, 무비자 입국 상태에서 워크퍼밋을 받기 위한 첫 단계로 자원봉사를 시작한 날.
한국에서 유치원 교사 자격과 경력을 갖춘 후, 영주권을 받기 위해 밟아야 할 벌룬티어의 첫 출근이었다.
바로 그날 오전, 센터에 소셜워커가 방문했다. 전날, 같은 도시에 거주 중이던 한국인 선생님에게서 “무비자 입국 후 벌룬티어하던 사람이 주변의 신고로 추방되었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그 상황은 내게 엄청난 공포로 다가왔다.
나는 조용히 현관을 나와 근처 쇼핑몰로 향했다.
한 시간쯤을 흐린 하늘 아래 걷고 또 걸으며, 마음을 진정시킨 후 센터로 돌아갔다. 돌아온 나를 본 동료 교사는 웃으며 “겁먹고 도망갔다 왔냐”고 했고, 센터 담당 오퍼레이터는 미소를 지으며 “여긴 당신이 함께 지낼 수 있도록 허가된 곳이니까 걱정 말라”며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잊고 지냈던 이민 초기의 기억이, 오늘 아침의 싸늘한 공기와 함께 불현듯 되살아났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무비자 입국 후 고용주를 찾아 워크퍼밋을 받고 결국 영주권까지 받은 성공사례들이 넘쳐났기에 나도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자신감이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9년의 경력을 가진 유치원 교사임에도, 워크퍼밋이 없다는 이유로 고용을 꺼리는 고용주들.
나는 LMIA 제도를 설명하며 나를 고용해 달라고 면접마다, 이메일마다, 직접 만나서 설득해야 했었다.
온라인으로 이력서를 보낸 곳만도 백 군데가 넘었고, 일주일 동안 이력서를 뿌리면 다음 주는 면접을 보러 다녀야 했다.
그렇게 두 달을 반복하며 점점 지쳐갔다.
더 큰 문제는 돈이었다.
한국에서 들고 온 3천만 원 남짓한 정착금은 중고차를 사고, 아이들과 살 집에 가구를 들이자마자 바닥이 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가구를 산 건 가장 후회되는 선택이었다.
“취업이민을 준비 중이라면 절대 가구부터 들이지 말 것.”
지금도 누구에게든 꼭 해주고 싶은 말이다.
통장 잔고가 바닥나고, 아이들과 다시 돌아가야 하나 고민했을 때 소파와 침대가 주는 무게감이 더욱 큰 후회로 다가왔다.
그것들만 없었어도 몇 달은 더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누구는 온라인 커뮤니티에 “숨만 쉬어도 월 300만 원 나간다”고 했지만, 나는 말 그대로 숨만 쉬는 삶을 살고 있었고 그런데도 아파트 렌트비 포함 월 생활비가 200만 원을 넘었다.
그럼에도 합법적인 근로가 불가능한 상태였기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날 미치게 만들었다.
면접을 다녀온 어느 날,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기러기 아빠’의 글을 읽으며 “나에게도 저렇게 걱정해주는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생각하다가 소파에 엎드려 펑펑 울기도 했다.
그날 나를 위로해준 건 매일 밤마다 듣던 그 노래 한 곡이었다.
“내가 네 편이 되어줄게~ 괜찮다 말해줄게~”
가사가 따뜻하게 귓가에 울릴 때마다 몸이 전율했고, 그 전율 덕분에 겨우겨우 잠들 수 있었다.
아이들 역시 캐나다에 오면 영화 속 2층집에서 방 하나씩 갖고 살 줄 알았겠지만, 실제 우리가 정착한 곳은 투베드 아파트였고 놀이터도, 친구도 없는 조용한 시골 동네였다.
아이들은 말하지 않았지만, 내 곁에서 힘든 엄마를 조용히 바라보며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날엔가는 뒷마당 잔디에 커다란 하트를 만들어 놓았다.
“엄마, 기운 내요”라는 무언의 메시지였다.
그 시절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었던 건 집 근처 바닷가로 데리고 나가 자연 속에서 마음껏 뛰놀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나 역시 그 바다를 바라보며 “다시 일어날 힘”을 충전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