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엄마로서의 두려움, 캐나다를 향한 간절함

내가 살고 있던 세상에서 벗어 나오고 싶었다 #2

by Helena J

쌍둥이 아이들이 한국 나이로 세 살이었을 때, 나는 이혼을 했다.


임신 중부터 아이 돌까지는 사실상 별거 상태였고, ‘아이들이 있으니 다시 잘 살아보자’고 재결합했지만, 만 2년도 함께 살지 못했다.


이혼 후, 온라인 쌍둥이 모임에서 알게 된 동갑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담담하게 내 상황을 전했다.
그녀가 내게 해준 말은 충격적이었다.


“내가 아는 언니도 이혼하고 친구 집에 하룻밤 묵었다가 그 집 남편에게 성추행당했어.”


위로받고 싶었던 내게 그런 말을 왜 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우리가 오랜 인연도 아니었고, 그 말은 나에게 단지 이혼녀가 된 나의 존재를 더 위험하게 느끼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모임 안에서도, 나는 어느새 구경거리처럼 느껴졌다.


이혼한 나에게 큰 잘못이 없었음에도, 사람들의 무심한 반응 속에서 조용히 입을 다물게 되었고, 그 뒤로는 누가 먼저 묻지 않는 한, 내가 이혼녀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아이들이 다니던 어린이집 엄마들에게는 더더욱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이 여섯 살이 되던 해, 가족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에 갔다. 그 누구도 묻지 않았는데, 우리 아들이 사진작가에게 말했다.


“아빠는 일하러 가서 없어요.”


그 말에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아이의 마음속에 ‘아빠가 왜 없을까?’ 하는 질문이 있었을 텐데, 그 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내가 미안했다.


초등학생이 된 아들과 그의 친구를 픽업하던 어느 날, 아들의 친구가 내게 물었다.


“그런데, 동동이는 아빠 있어요?”


나는 멍해졌다.


“응, 있지. 회사가 멀어서 가끔 볼 수 있어.”


아이 앞에서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그날 이후, 나는 아이들의 카카오스토리에 아빠와 함께한 사진들을 일부러 올리기 시작했다.


1년에 몇 번 얼굴을 보는 그 사람에게 연락을 해 아이들과의 시간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캐나다로 이민을 왔더라면, 이런 상처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빠가 없는 가정에서 자라는 것에 대해 감춰야 했던 어린 마음의 움츠림, 거짓말로 방어해야 했던 자존감의 흔들림을 아이에게 겪게 한 것이 아직도 가슴 아프다.


“엄마, 우리 집은 몇 평이야?”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아들이 몇 번이나 같은 질문을 했다.


친구 집들을 다녀오며, 무언가 비교를 시작했구나 싶었다. 서울에서는 아파트 단지 안에서 몇 동에 사는지만 알아도 그 집의 평수나 형편이 드러나게 되어 있었다.


나는 두려워졌다.


인터넷 기사에서 본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 수업시간에 부모님의 직업을 말하는 시간이 있고, 그때부터 아이들이 사회적 격차를 체감하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 순간 머릿속에 스쳤다.


‘드디어 올 것이 오는 건가?’


나는 아들에게 말했다.


“누가 집이 작다고 하면, 우리 곧 캐나다로 이사 갈 거라고 해. 거기 가면 큰 집에서 살게 될 거야.”


아들은 영화에서 본 정원이 딸린 2층집을 떠올리며 신나 했다.


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혹시 친구들이 우리 집 물건이 낡았다고 하면, 우린 이사 갈 거니까 다 버릴 거라고 해.”


아이의 자존감이 친구들 앞에서 다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렇게 대화 시뮬레이션을 함께 연습하기도 했다.


나 역시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 상대적 박탈감이 얼마나 초라한 감정을 만드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경우는 20대가 되어 이성을 만나고서야 나의 가정환경이 결혼의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요즘 아이들은 훨씬 더 빨리 그 현실을 깨닫는다는 것에 놀랐다.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며, 문동인의 상황이 남일 같지 않았다.


“세상에 돈으로 되는 일만큼 쉬운 게 어디 있어!”라는 대사는 이 사회의 잔인한 진실을 찌르는 말처럼 들렸다.


돈과 인맥으로 죄를 덮고, 힘없는 사람은 외면당하는 현실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아이들을 이 사회로부터 지켜낼 수 있을까 두려워졌다.


학교폭력, 왕따, 빵셔틀 같은 단어들이 기사에 나올 때마다 ‘하루라도 더 늦기 전에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전문직 고소득 싱글맘이 아니었던 나로서는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현실이 이미 뚜렷했다.


직장인으로서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지도 확신이 없었다. 정말 하루살이처럼, 미래가 불안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리고 생애 처음으로, 학창 시절 공부를 더 열심히 하지 않았던 자신을 후회했다. 좋은 대학, 좋은 전공, 전문직이 되지 못했던 것. 그 모든 후회는, 내 아이에게 힘 없는 가난한 엄마가 되었다는 미안함으로 이어졌다.






이전 06화독립을 말하다, 외로움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