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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lena J Feb 08. 2023

심리적 공허함으로 방황했던 청춘

지워버리고 싶었던 과거 #3

심리적 공허함으로 방황했던 청춘

오랜 기간 유치원 교사를 하면서부터 아이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서로 간의 분쟁을 중재하고 지도하면서 나 스스로가 내가 내뱉었던 내 안에서 나온 그 언어를 통해 내 과거를 뉘우치고 깨달았던 점들이 많았다고 생각한다. 


나 스스로 자아성찰지능이 높은 편이라 생각하는데, 아마도 이렇게 직업적으로 아이들과 생활하면서부터 나 스스로 몰랐던,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나만의 인관관계에서의 단점이나 모순을 스스로 객관적 관점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요즘은 오은영박사님이 진행하시는 금쪽 상담실 프로그램을 시청하면서 새로운 내 안의 자아를 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내 가정 안에서의 성장배경과 나의 성장과정이 어떻게 현재의 나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온 저녁이 되면 내 몸의 휴식을 취하면서 정신은 인간의 심리세계를 탐구하는데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한편으로는 화려한 생활을 하고 있는 유명 연예인들조차도 과거의 힘든 환경이 있었고, 그로 인해 현재도 인간관계나 자신의 심리 상태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면서 그 안에서 동질감을 느끼끼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내 삶만이 고달프고 외로운 것은 아니라는 일종의 스스로 위안감을 얻기도 하고 있다.


오래전 과거를 뒤돌아 보니, 정말 철이 없던 초등시절에는 동네 아이들과 종이딱지 날리기, 고무줄놀이도 하고 하루 종일 바깥에서 뛰어놀기를 많이 했었다. 


초등학교시절 자전거 타기를 스스로 터득했는데, 어린이 자전거로 배운 것이 아니라, 뒤에 짐을 실을 수 있는 화물용 자전거가 나의 첫 자전거였다. 자전거에서 발을 딛고 섰을 때 까치발을 해야 바닥에 닿을 수 있었던 아주 커다란 아저씨용 자전거로 혼자 자전거 타기를 배웠고, 그 자전거를 차들이 지나다니는 동네 골목길을 타고 다녔다. 


당시만 해도 동네 공원이나 자전거길이란 것이 따로 없었으니, 우리 집 슈퍼가 있던 공네 골목길에는 차들과 사람 그리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서로 뒤섞여서 생활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갑자기 마주 오는 자동차를 피하느라 내가 타고 있던 화물용 자전거를 까치발로 딛고 섰었는데, 때마침 중국집 배달 오토바이가 서 있는 곳에 오토바이 엔진에 내 종아리가 닿아서 화상을 입었던 적도 있었다.  


슈퍼 앞에 큰 대로변, 지금의 시흥대로 앞에는 육교가 있었는데, 학교를 다닐 때도 육교를 건너 다녔었지만, 친구집을 찾아다닐 때에도 육교 건너 아주 먼 곳까지 서슴없이 다녔던, 지금 생각해 보면 난 참으로 활동적이었던 어린이였던 것 같다.


사춘기란 것이 바로 그런 것인가? 


나이를 먹어 중학생이 되고 성장하면서 조금씩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외로움을 찾기 시작하였다. 신학기가 되어 내 책상 주변을 둘러싸고 앉아 있었던 많은 아이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사라지고 점점 혼자가 되어 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럿이 어울려 놀기보다는 언제인가부터 단짝 친구랑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하였고, 그 단짝 친구에게 다른 친구가 생겨 일종의 삼각우정관계가 되면 그 관계가 불편해서 자연스럽게 그 관계를 포기하고 혼자가 된 적도 있다. 


친구들에게 말로 대화를 하는 것보다 편지로 마음을 전달하는 것을 좋아하여서 중학생 때는 친구들과 우정의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었다. 우현히 국제펜팔이란 것도 알게 되었고 관련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센터를 통해 머나먼 나라 러시아의 또래 소녀와 친구가 되어 일 년 정도 영어로 펜팔을 한 추억도 있다.


학교에서 누구에게 왕따를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한 적은 없었지만, 학교 일과 중 주어지는 자유시간이 찾아올 때면 어울릴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은근히 받았던 것 같다. 


단짝이었던 친구와 반이 달라지는 새 학기였던 봄 소풍 때 함께 갈 친구가 없어서 엄마에게는 배 아파서 학교 못하겠다고 하고는 결석을 한 적도 있다. 우리 엄마는 내가 꾀병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가 아주 가끔씩 학교 안 가겠다고 하면, 학교 담임선생님께 전화를 걸어서 내가 아파서 학교에 못 간다고 대신 말씀해 주셨다. 


엄마는 나에게 한마디라도 묻거나 의심하지 않으시고 그냥 내가 말하는 대로 믿어주시고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으셨었다. 하지만 나 스스로가 집안에 그러고 있는것이 마음이 불편해 다음날이면 훌훌 털고서는 다시 학교를 발걸음을 향하였었다.


내가 느꼈던 인간관계의 외로움은 내 가족으로부터, 특히나 내 엄마로부터의 관계에서가 시작이었던 것 같다.


중학생 때 학교를 마친 후 돌아와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엄마에게 대화를 시작하면, 하루 종일 어린 동생들과 함께 집에 있었던 엄마의 차가운 말과 함께 저리 가라며 귀찮은 듯이 날 밀쳐내셨던 기억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상처로 남아 선명히 기억이 난다. 


때로는 엄마와 가까워지려고 엄마 정을 받고 싶어서 노력하는 큰딸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기도 하셨다. 반바지를 입고 있었기에 내 허벅지 위에 선명했던 엄마의 손자국은 내 마음속에 더 깊은 상처를 만들고 거리감을 만들어 주었다. 


동네 아줌마들은 모녀지간이 매일 붙어 앉아서 싸운다고 놀려대듯이 말하셨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순간은 엄마로부터의 사랑을 받고 싶어 몸부림을 쳤던 간절한 시간들이었다. 


그런 일들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점차 말수가 적은 사춘기 아이가 되었고, 여성으로서 처음 하는 생리도 엄마에게 말 안 하고 학교에서 받았던 성교육을 바탕으로 나 스스로 알아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처리하게 만들었다.


가정에서 대화로 소통을 하지 못하고 단절된 상태로 그렇게 성장한 난, 대학입시나 진로 관련 고민 등등을 누구에게도 터놓고 말하지 않았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하는 것이 나 스스로에겐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스스로 성숙한 성인이 아니었기에, 나의 선택은 항상 즉흥적이었고 후회되었던 선택을 참 많이도 했던 것 같다.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결혼도 그중의 한 가지였다.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지만, 손꼽히게 남은 친구 몇 명이 나의 인간관계의 전부였고, 그 친구들역시도 대학생활과 연애생활을 시작하면서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었기에 성인이 된 후 거의 연락할 사람 하나 없는 외톨이로 지냈던 것 같다. 


적성에 맞지 않은 전공 선택을 한 대학생활은 그런 날 스스로 더 불행하게 생각하게 만들었고 학과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흥미도 없었다. 꿈 많고 희망이 가득 찼어야 했을 아름다운 청춘이었어야 했던 대학생 시설에 난 '죽고 싶다는 말'을 주변 사람들에게 밥먹듯이 많이 했었다. 


하지만, 말만 그렇게 밥먹듯이 하고 다녔을 뿐 정말 죽고 싶다고 생각을 하거나 그 방법을 찾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난 그렇게 해서라도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을 정도로 상당히 고독했었던 것 같다.


사회생활을 통해 만난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또한 내 우울을 더욱 증가시켰다. 


누군가에게 먼저 상처를 주는 것이 싫어서 남에게 싫은 말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고, 반대로 누군가가 내게 상처의 말을 주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으로 어려웠다. 


20대의 내 모습을 되돌아보면, 성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 대화를 통해 서로 불편한 점을 소통을 해왔어야 했는데, 내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그냥 참고 말 안 하는 것, 스스로 묻어버리는 것이었고, 그런 난 융통성이 없는 어찌 보면 사회성이 크게 부족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가정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누구에게 인정받지 못한 외톨이로 자란 내가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긍심을 가졌을 리는 없다. 그렇기에 남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의사표현을 잘하고 대인관계속에 여우처럼 처신을 잘하는 사람들의 관심을 가져가는 직장동료들을 보면서 부러움도 느끼면서 한편으로는 열등의식도 가졌었던 것 같다.


당시 천리안 하이텔을 시작으로 온라인 채팅방 모임이 시작되었고, 현실세계에서의 공허함은 온라인 세상 속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채우려 했던 것 같다. 채팅으로 사람들이 소통한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 안에 들어만 가면 여러 명의 사람들이 항상 있어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한편으로 내 쓸쓸함을 일시적으로 채워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오프라인 모임에 나가면 난 여전히 말수 없는, 나 스스로에 대해 내세울 것이 없는 아주 보잘것없었던 존재처럼 여겨졌고, 그렇게 채팅을 통해 오프라인으로 만난 사람들 역시 좋은 배경을 가진, 좋은 학교를 졸업한,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을 선호하는 것을 보면서 거기서 나의 온라인 채팅모임에 대한 환상도 깨어졌던 것 같다. 


온라인이라는 가벼운 매개체로 만난 친구들과의 인연은 상당히 가벼웠고, 그 안에서 스쳐지나간 몇 번의 연애를 하며 그렇게 20대를 보내면서 회색빛 성장과정으로부터 나온 내가 만들어낸 내 청춘은 흑검정 암흑의 세상처럼 나를 가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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