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버리고 싶었던 과거 #2
"공주야~”
중년의 여성이 다정한 목소리로 20대쯤 되어 보이는 딸을 불렀다.
다 큰 딸을 ‘공주’라고 부르며 함께 관광을 다니는 그 모녀의 모습을 보자, 순간 ‘나도 엄마의 공주였더라면…’ 하는 마음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서글퍼졌다.
그날은 내가 이혼 후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에 머물던 시절이었다. 주말이면 부모와 형제들 틈에 끼어 숨이 막힐 것 같아, 당시 다섯 살이었던 쌍둥이 아들들을 데리고 관광버스를 타고 당일치기 여행을 다녀온 날이었다.
이민 관련 온라인 카페에서, 이미 성인이자 한 가정의 가장임에도 불구하고 부모의 지원을 기대하거나 실제로 도움을 받아 경제적 위기를 넘겼다는 글들을 종종 보게 된다. 엄마가 보내준 김치나 반찬을 자랑하듯 올리는 글도 있다.
그럴 때면, 아이 둘을 혼자 키우며 가장 역할까지 해내야 하는 내 삶이 괜히 더 서럽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왜 나는 복도 없고, 의지할 사람 하나 없을까’
잠시지만 그렇게 신세한탄을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문득 생각해보면, 내 엄마도 일본에 사는 동생에게는 김치며 반찬이며 정성껏 싸서 국제항공으로 부쳐주곤 했다. 그러니 나만 못 받았을 뿐, 내 엄마도 다른 이들 글 속에 등장하는 그런 엄마이긴 했던 것이다.
내게 엄마란… 가까운 곳에 있어도 늘 멀게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전화하면 통화는 할 수 있었고, 아이들이 아파서 어린이집에 못 가면 일주일 정도는 봐주시기도 했다. 물리적으로는 곁에 있었지만, 정서적으로는 늘 낯선 사람 같았다.
어느 날, 엄마와 함께 이마트에 간 적이 있다. 장을 보며 “이건 동생이 좋아하지”, “이건 둘째가 좋아해” 하며 이것저것 고르시는 엄마를 보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는… 알고 계실까?’
나는 항상 비교의 대상이었다.
똑똑하고 야무진 동생과 비교되어, 언제나 엄마의 말 속에서 나는 ‘멍청하고 느린 아이’였다. 그런 비교는 어린 시절 내게 깊은 상처였고, 그래서 내 아이들을 키울 때만큼은 절대로 비교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살아왔다.
어느 날은, 갑작스레 내 방에 영창 피아노와 아주 큰 책상이 들어왔다. 동생과 함께 쓰는 좁은 방의 절반을 차지한 그 책상은 설치 기사님이 “비싼 책상이니 공부 열심히 하라”고 하셨던 게 기억난다.
그 피아노와 책상은 솔직히 값어치 있게 쓰이지 못한 채 자리만 차지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