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단면의 총합인 원형으로서의 나
난 동그란 사람이다.
얼굴은 물론이고 눈도 손도 유난히 동글다. 내가 그린 그림들도 시원시원하고 쭉 뻣어가는 느낌보다는 동글동글하고 웜톤의 색에 손이 갔다. 이 때문인지 대학교 들어가서는 동기들이 한동안 컴퍼스라고 놀렸었다. 컴퍼스 하나면 나를 다 그릴 수 있다나 뭐라나. 아, 1학년 첫 학기 자화상 그리던 시간에 그때 놀릴거리를 흘리면 안 됐는데! 유난히 둥글둥글한 내 자화상과 나의 싱크로율에 다들 대놓고 폭소를 하더니 이후로 빈대떡이다 뭐다 어감이 웃긴 원형 사물은 다 내 별명이 되었다. 한껏 들떠 시작한 캠퍼스 생활에, 학과 공인 컴퍼스라니. 참 깬다.
“난 첨보고 딱 서울깍쟁이가 이런 느낌인가 그랬어”
입학하고 한참 지났을 때 한 대학 동기가 나에게 고백한 내 첫인상은 이랬다. 지금은 그런 오해가 풀렸다고 고해성사처럼 말하면서. 지방에서 온 그 친구는 내 입학 첫날 모습을 보고 그간 날 경계했었다고 했다. 모든 게 첨이라 군기가 바짝 들어있던 내 모습이 그렇게 해석되었나 보다.
이 두 가지 인상을 아직까지 기억하는 것은 두 이미지가 주는 상반성 때문이다. 빈대떡과 서울깍쟁이라니.
새 학기를 맞이하는 내 모습은 하나였을 텐데 극과 극의 이미지로 해석된다. 그리고 두 가지 모두 다 어느 정도 나에 대한 진실성을 포함하고 있다. 나는 평생이 둥그런 사람이고, 또 그때 난 경쟁적인 '입시미술 모드'가 눈빛에 아직 남아 '모든 놓치지 않는다, 질수 없다!'는 깍쟁이의 측면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나를 급히 설명하려고 할 때, 잘 이해시키려고 욕심이 앞설 때, 혹은 상대방에 대해 빨리 더 알고 싶을 때 이런 오해들은 더 많이 발생한다. 미지의 영역의 있는 타인을 빨리 한 가지 색으로, 정형화된 모양으로 규정하여 그 '모름'의 불안을 소거하고자 한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자연스레 알게 될 상대방의 전체성을 속전속결로 타임슬립해 ‘내 너를 안다’라고 말하고 싶어한다. 연애 초기 그날따라 과일을 맛있게 먹었더니 난 ‘과일을 좋아하는 애’로 규정되어 만날 때마다 과일을 한 다발 들고 와 내 행복한 먹방을 기대하는 남자친구의 눈길은 당황스럽다. '난 사실 보통은 국밥파야', 얘기도 못하고 ‘아 어쩜 내가 생각보다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을지 몰라’하며 열심히 기대에 부응하기도 한다. 이런 나에 대한 서툰 규정들은 나조차 '내가 아니다'라고 성급히 선 그었던 것들을 경험하고 나라는 범위를 넓혀주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혹은 날 너무 정형화된 틀에 넣어 상대방에게 이해시킴으로써 불편한 오해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내가 동그란 사람이라면, 원형은 몇 개의 꼭짓점을 가지고 있을까? 또, 몇 개의 단면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하루 한 개씩 글을 쓰겠다고 다짐 후 요즘 내가 속도를 내 써 내려간 글 목록을 유심히 보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글들은 얼마나 나의 전체성을 포함한 글일까... 그리고 문득 두려워졌다. 이 글로 나 스스로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빠르게 규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매일 많은 일정의 부담을 지기도 하지만 지도교수님 미팅을 한 시간 남기고 될 대로 돼라! 라며 덮어놓고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 수도 있는 사람인데! 잘하고 싶은 일엔 게으름을 피우지만 사실 평소에 뭐든 빨리빨리 달려 다니는 조급증의 대명사인데. 각 글에 그날, 그 내 생각의 단면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이를 나 전체로 받아들이는, 나에 대한 어떠한 오해를 방조한 글은 아닐까?
혹여 이 글로 나를 처음 만나는, 혹은 앞으로 글로만 나와 인연이 될 분들에게 당부드리고 싶다. 이것은 원형으로 이뤄진 많은 나의 생각의 단면들이라고. 그래서 이 글 하나가 나를 다 대표할 수는 없어도 내가 가진 많은 부분 중 하나라고. 때론 각 글들 속에 담긴 생각과 태도가 충돌하거나, 난 얘가 이런 하얗색인 줄 알았는데 요론 검은색이네! 할 수 있어도 그 모든 부분이 원형 속에 포함된 나라고. 그리고 평생을 둥글게 규정해 온 나에게서 혹여나 뾰족한 단면을 마주하게 될 분들이 있다면, 놀라실지도 모를 당신에게 이 글로 변명처럼 보일 양해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