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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기분법' 몰아내기

감정이 원칙을 가장할 때

by Helen J

보통은 길 건너 에스프레소 맛집을 선호하지만, 미팅 전 급한 커피처방이 필요할 때는 학교 옆 가까운 스타벅스를 가곤 했다. 그리곤 가장 빠르게 준비될 수 있는 메뉴를 주문하는 것이다.

'Today’s coffee (오늘의 커피)'.

주문하다 피식 웃음이 났다. 그날의 재고상황에 따라 원두가 달라지는 내가 주문한 그 메뉴가 그날따라 다가올 내 운명을 예고하는 듯 보였다.


유학생활 중, 학위 과정과 관련하여 개인의 특별한 상황을 승인받기 위해서는 결국 A 교수님을 만나야 했다. 그 만남이 어떻게 흘러갈지 몰라, 약속 당일 아침부터 체한 듯한 느낌이 들곤 했다.

"She's a bit strict, right?"
(그 교수님 좀 엄격하지?)

내가 평소와 다르게 불안해하는 모습을 본 친구들은 A 교수와의 만남에 대한 긴장을 이해하며 한 마디씩 건넸다.


하지만 내가 A 교수를 만나기 꺼렸던 이유는 그녀가 엄격하다거나 대단한 원칙주의자여서 내 상황의 특수성을 배려하지 않을까 봐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내게 그 교수는 그리 strict 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지나치게 감정적인 사람으로 보였다. 내 미팅의 결과는 그녀의 그날 기분에 크게 좌우되었다. 열에 아홉, 그녀에게 별일 없는 보통의 날엔 내가 예상한 상식선의 답변을 들었지만, 기분이 안 좋은 날 걸리면 꼭 삐딱선을 탔다. 황당해하는 내게 주변 친구들은 내 옆구리를 찌르며, “오전에 교수미팅 분위기 안 좋았었대. “ 하곤 했다. 내가 미팅을 가는 건 꽤 나에게 중요한 학제 관련 결정을 그녀에게 todays‘s mood로 주문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날 그녀의 잔여 감정에 따라 내가 받을 처분이 제공되는.


유난히 제멋대로 판단을 내린 날이면, 그 교수는 내 자세한 상황을 듣고 자신의 의견을 수정하는 것에 오히려 더 극도로 저항했다. 무심코 뱉어낸 자신의 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여러 가지 불명확한 교칙이나 선례를 들었다. 근거 미약을 내게 들킨 것 같은 날엔 사례를 찾을 시간을 벌고자 자세한 건 다음 주까지 메일로 주겠다며 답변을 지연시키기도 했다. 맞는 말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그녀의 집념은 그녀의 충동적 처분을 꽤 그럴듯한 원칙의 그것으로 탈바꿈시키곤 했다.


그녀는 원칙주의자를 표방한 기분주의자였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의 감정대로 행동하면서도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합리화한다. 나는 이것이 정말 비겁하다고 생각한다. 치사하다. 차라리 "내 기분이 그래요"라고 솔직하게 말한다면 같은 결과라도 속이 라도 시원할 텐데. 서로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 소통하면서, 감정이라는 비합리적 껍질을 벗기고 더 합리적인 방향을 같이 찾아갈 수도 있는데.


이들은 굳이 없는 원칙을 코에 걸면 코걸이인 듯 사용하여, 자신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자신의 감정을 ‘원칙’이란 대의명제에 끼워 팔려한다. 그러면서 이것은 '원칙'이니 다른 이들도 응당 수긍해야 한다고 압박하는 것이다. 그들의 이 ‘지 기분 원칙‘에 반발하는 ‘합리적 요구’는 쉽게 묵살된다. 그들의 기분 프레임 안에서 그것은 원칙에 어긋나는 예외를 인정해 달라는 ‘비합리적 청탁’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가끔 참석하던 모임에서 어떤 멤버가 나에게 극심한 반감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사실 처음부터 눈치챘다. 내가 그 모임에 합류했을 때부터 그녀는 내 존재 자체에 대해 불편함을 온몸으로 표현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인가 싶어, 나는 나대로 '저 위험한 사람 아니에요' 모드로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려 애썼다. 모임에서 그냥 있는 듯 없는 듯도 잘 존재하는 나이기에 그녀도 나도, 서로의 존재에 금방 적응할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놀라운 건 내가 무해한 사람일수록, 내가 제안하는 일이 긍정적일수록, 그리고 그 모임에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클수록 그녀의 반응이 더 히스테릭해졌다는 점이다. 그녀는 내가 나쁜 사람일까 봐 경계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내가 좋은 사람일까 봐 더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본인을 주인공으로 꽤 통제감을 주던 이 그룹이 비통제적으로 될까 내 존재를 위협적으로 느낀 것 같았다. 멤버들이 내 긍정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호감을 가지는 건 그녀에겐 왠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수였다. 이건 그녀 스스로도 포함되어, 그녀는 날 잘 모르면서도 나를 좋아해서는 안된다고 다짐한 것처럼 보였다. 애와 증은 종이 한장 차이라는 데, 이 정도 열기의 반감은 열렬한 애정의 반영인가 헷갈릴 지경이다. 서로의 유익을 발견하고 타인과 연대하려는 목적의 모임에서, 나는 역설적으로 내 긍정성이 모임에서 드러나지 않도록 옭아매고 되도록 혼자여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녀는 아마도 자신이 느끼는 이 경계심이 나의 긍정적인 면모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자존심 때문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마주치지 않고 싶은 감정의 근간과 두고 싶은 거리에 비례해, 그녀는 다른 멤버들과 나를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만큼, 그들이 나의 좋음을 경험할수 없을 만큼 떼어 놓고자 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나의 행위에 비원칙성‘을 공증하는 데 열을 올렸다. 사람들이 좋다고 한 내 제안에 나쁨을 입증하는 것보다 절차적 비정당성을 주장하는 편이 그녀에겐 수월해 보였을까. 내가 제안하는 모든 일에 존재하지도 않는 원칙을 가져와, 절차가 잘못되었다고 사람들 앞에서 공표하기 바빴다. 사람들이 그녀의 주장에 동요하지 않으면 나에 대한 경계 반응은 더 극심해졌다.


적당히 그녀의 말에 따라주려고 하려 해도 그녀가 말하는 원칙들은 나의 행동 이후에 갑자기 만들어졌고, 전혀 예측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원칙들은 오직 나의 행동에만 적용되었다. 그녀 스스로와 다른 이들이 제안하는 것들은 원칙의 장벽을 뛰어넘는 슈퍼패스라도 받은 듯 그녀에게 기쁨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내가 하는 일에는 유독 지켜야 할 원칙이라는 이름의 영수증이 따라붙었다. 적혀 있지도 않은 상품의 제 값을 지불할 수 없듯, 나의 행동은 항상 사후에 그녀에게 빚을 진 것처럼 송구스러워졌다. 내 고충을 짐작한 타 멤버들이 나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람이 너무 올곧으면 부러지는데, 걔가 좀 원칙주의자라 그래요".


그녀 또한 원칙주의자를 표방한 기분주의자였다.





자신의 정리되지 않은 감정을 왜 원칙이란 옷을 입혀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는가. 내 삶에서 이런 지질함은 앞서 설명한 두 사람으로도 충분하다고 느끼는데, 사실 앞선 두 사람의 존재는 미미할 정도로 더 큰 '원칙주의자를 표방한 기분주의자'가 떡하니 우리나라의 미래를 막고 서 있다.


그는 운 좋게도 '자신이 말하는 원칙'이 사실 '정리되지 않은 그의 기분'임을 알아채지 못한, 심지어 뭔가 새로운 원칙 해법이지 않을까 희망을 건 몇몇 국민들 덕에 우리나라의 최고 통수권자라는 자리까지 차지했다. 그가 집권하고 '법치주의'라는 말이 강조될 때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아, 이 사람도 법치주의를 표방한 지 기분파구나. 아, 그놈의 그의 기분!!! 때문에 우리가 함께 체불해야 할 민주주의 복구 요금은 얼마나 될까!


그는 이제 자기 자신까지 속이려 하고 있다. 지 기분이 아니라 정말 정의를 위한 무언가였다고 자신도 세상도 속이려 든다.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데로 허용하지 않은 '지 기분파' 원칙을 따르지 않은 민주주의의 원칙을 비난한다. '법'치주의를 다시 세워야 한다면서 그 안에 다시 한번 '지 기분법'을 슬쩍 끼워 넣어 또 한번 자신의 맘대로 뭐든 하는 세상으로의 복귀를 꿈꾼다.


이제 정말 이런 유형의 인간들에게는 지칠 대로 지쳤다. 우리 이제 이런 '지 기분법'은 몰아내자.

이번 주에는 부디 이 '지 기분파' 우두머리를 몰아내고 편안하게, 정말 기분 좋게 다리 쭉 뻗고 잠을 잘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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