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와 부패의 차이
얼마 전 생을 달리 한 가족원을 추모하는 마음을 빵의 발효 과정에 빗댄 연극을 보았다. 반죽을 적정 온도에 두면,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신기하게도 열심히 움직여 퐁신한 발효 반죽을 만들어내는 과정처럼, 어떤 중요한 과정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주인공은 가족의 죽음, 그리고 그들의 생전의 삶의 흔적을 마알간 얼굴로 쫏아간다. 거리를 두고 보면 책을 읽거나, 빵을 반죽하는, 일상적으로 보이는 그 장면들에서 주인공은 잃은 가족의 애도라는 중요한 삶의 과제를 해 간다.
그리고 극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내 조명하지는 않았으나, 그 가족의 죽음의 이면에는 이에 주요하게 영향을 끼쳤을 죽은 자의 ‘사회의 약자로서 겪었을 부조리함’의 조각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다. 가난, 고립, 재개발로 인해 생활의 공간이 없어질 수 있다는 불안 등. 극을 쓴 작가는 자신을 ‘극이라는 빵을 만드는 효모’로 비유하며, 사회에 산재한, 그러나 충분히 이야기 되지 않은 것들을 극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자신의 소명을 말했다. 그러면서 관객들에게 "당신들은 삶에서 어떤 빵을 만들고 있나요?" 하고 물었다.
극을 보고 나오는데, 잘 발효된 빵 반죽의 시큼한 냄새와 구워진 빵의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맴도는 듯했다. 물론 극에서 그 냄새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발효의 과정이 내 몸에 남은 듯한 느낌이었다. 작가라는 효모가 나, 그리고 내 생각에 들어와 반죽되는 기분이 들었다.
어떤 생각들은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가 잘 발효되어 새로운 행동으로 발화되기도 한다. 어쩌면 내가 쓰는 이런 글들도, 삶의 어느 순간 머금었던 생각들이 마음속에서 숙성되어 나온 결과물일 것이다. 요즘은 아침마다 하루 한 편의 글을 쓰기로 다짐하고, 길을 걷다가 불쑥 떠오른 생각들을 놓칠까 봐 메모해 둔다. 어떤 생각들은 마음속에서 잘 발효되어 글로 나오는가 하면, 어떤 생각들은 그저 부패해 버렸는지 써보려 하면 자꾸 마음속에서 미끄러져 다시 가라앉고 만다.
무엇이 발효되고, 무엇이 부패하는 걸까?
결국, 효모라는 보이지 않더라도 열심히 일하는 그 행동하는 생명체가 없다면, 밀가루 덩어리는 부패하고 만다. 이 극이 나에게 효모가 되어 이 글이 되었듯, 나도, 당신도 서로에게 열심히 새로움을 불어넣는 효모가 되어주면 좋겠다. 꼭 요란하게 '이 빵을 내가 만들고 있네!'하고 소음을 내고 뽐내지 않아도 성실히 반죽을 숙성시키고 살려내는 '서로라는 반죽의 효모'였으면 좋겠다. 서로의 생명성에 기대어 각자의 생각을 정리하고, 성장시키고, 요동시켜 결국 더 큰 무언가로 발효시켜 내기를 바란다.
*2025. 3. 21. 원인진 <변두리 소녀 마리의 자본론> 을 관람하고 쓴 글입니다. 제가 관람한 극은 본 공연 전 쇼케이스로, 오는 9월에 본 공연이 올려질 것이라 합니다. 그때 많은 분들이 관람을 통해 작가님의 효모를 자신의 반죽에 더해 오는 경험을 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