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12. 2025. 8:45am
얼마 전 지인 분이 잠깐 시간이 났다고 부근에서 식사를 하자고 연락이 왔다. 가기 전에 살짝 망설여졌다. 예정되어 있던 일정을 미뤄야 하기도 하고... 그래도 서로 시간이 맞을 순간이 얼마나 있겠나 싶어 식사 자리에 나갔다.
"자, 즐깁시다!"
지인 분은 늘 이렇게 나에게 식사를 권한다. 난 그런데 왜 그 다정한 청유문이 마치 전쟁에 나가는 선포문처럼 들릴까.
사실 그 지인 분과 식사하는 일은 언제나 긴장되는 일이다. 그분과 식사하는 10여 번 동안 한 번도 식당 서비스에 대해 불평하지 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곳은 음식을 제때 리필해 주지 않아서, 옆접시를 따로 주지 않아서, 음식 맛이 좋지 않아서, 음식 메뉴에 어떤 것이 없어서... 같이 식사하는 나에게도 이런 불만을 이야기하지만, 보통 점원을 불러서 필요한 사항을 지시하듯 말한다. 마치 자신이 고용한 개인 가정부에게 일이 아직 서툴다고 꾸짖는 듯한 태도로... 점원들의 당황한 모습과 마치 갑을 관계 같은 그 순간을 지나가는 것은 너무 고된 일이다.
그분은 '이 식사의 이 거대한 문제점을 식사하는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 내가 대표해 잔다르크처럼! 얘기해서 해결해야지!' 라고 이런 행동이 식사하는 상대인 나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동상이몽도 이런 동상이몽이....나는 보통 검색후 선택한 어떤 식당을 가도 맛있다.(한국 요식업 만세!). 맛이나 서비스가 대체로 형편없다고 하는 식당은 인터넷 검색으로도 무난히 소거가 가능하기도 하다. 그런데 내가 맛있다고 생각한걸 그분은 맛이 형편없다고 생각하거나, 난 충분하다고 생각한 식당서비스를 식당의 무지로 생각하기 때문에 그분의 의견에 대체적으로 동의도 안될 뿐만 아니라 그분이 어떤 불평을 할지 몰라 식사 내내 긴장이 된다. 이 긴장을 피하고자 그 지인이 공짜 표가 생겼다고 공연초대를 할때 평소엔 잘 가지 않는 꽤 고급호텔의 식당을 예약해 대접하기도했다. 하지만...그 별 다섯개의 호텔 레스토랑도 그분의 비난을 피해가진 못했다.
그래도 10여 번의 식사 동안 그분과 대화가 즐겁지 않았던 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그래, 대화를 하러 간다’는 생각으로 그분과의 식사자리에 응해왔다. 기분 좋은 식사에 대한 기대는 내려놓은 채.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는 우연히 신분이 뒤바뀐 두 사람의 운명을 말한다. 에드워드 왕자는 장난으로 톰이란 거지와 옷을 바꿔 입었다가, 운명의 장난처럼 둘을 헷갈려 한 경비병 때문에 궁에서 쫓겨난다. 그가 궁 밖에서 바라본 현실은 궁 안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왕으로서 당연히 자신에게 주어졌던 대접과 지위를 모두 상실한 채, 그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마일스 기사 덕에 목숨을 부지한다.
그 지인의 식사 자리에서의 태도는 궁에서 쫓겨난 에드워드 왕자를 떠올리게 한다. 식사 자리에서 마치 그 식당이 제공하는 최대한의 무언가를 얻어 가야겠다는 그분의 태도, 그리고 ‘투쟁하지 않으면 나를 잘 대해 주지 않을 거야’라는 언저리의 메시지는 “나는 왕자인데 너희들의 무지로 날 왕자로 대하지 않을 거야. 어디 감히!”라고 외치는 것 같다. 하지만 식사 자리에서 누군들 남의 인정과 대접을 받으려 하는 처절한 전투를 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치 갑옷을 입고, 총칼을 차고 외치는 것 같은 그분의 ‘즐깁시다’라는 음식앞에서의 청유가 나는 공허하고 슬프게 들린다.
그 공허함과 슬픈 몸부림은 내가 처음 타지에서 정착하려고 노력할 때의 몸부림을 생각나게 한다. 처음 집을 떠나 내 공간을 가졌을 때, 한창 인테리어에 몰두해 집을 가구 카탈로그처럼 꾸며 놓았었다. 늘 일어나 침구를 정리하고, 꽃을 사다 꽃병에 넣어두고. 하지만 정말 예쁘게 꾸며놓아도 뭔가 부족한 것 같았다. 그 부족한 느낌은 나를 더 인테리어에 매몰되게 했다.
그러던 어느날 친하게 지내던, 서로 룸메인 대만 친구둘이 자신에 집에 놀러오라고 했다. 난 마트에 들러 벤엔제리스 아이스크림을 2+1으로 세가지 맛을 사서 그곳에 갔다. 친구들은 파자마를 입은 채로 나를 맡이했다. 둘다 한국음식을 나보다 더 좋아했는데, 본인들 스타일대로 끊인 국적불명의 김치찌개와 몇 개의 통조림을 꺼내 놓으니 그럴싸한 한상차림이 되었다. 그리고 대만 예능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며 같이 식사를 했다.
난 대만 어로 된 그 프로그램을 이해하지도 못했지만 그 식사를 인상에 남는 가장 좋았던 식사라고 감히 말하고싶다. 정말 식구처럼 숟가락 하나 더해 내어주는 한끼. 먹고싶으면 더 먹어도 되고 그만먹어도 되고 ‘어차피 우린 같이 즐거울거야’라고 믿는 하나도 긴장이 없는 한끼. 음식이 맛이 없거나, 혹은 속상한 일이 있어도 다 털면서 이야기 할수있는, 기분이 좋아도 되고 나빠도 되는 한끼. 굳이 사치스런 디저트 맛집에 가서 최고로 유행하는 디저트를 사가지 않아도 되는 초대. 나는 정말 잘 먹었다고 친구들에게 고맙다고 했는데 그 고맙다고 듣는 친구들의 표정이 생경했다. 뭐가 고맙지? 하는.
나는 편안함이 우리가 서로에게 줄수 있는 최고의 다정함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긴장하지 않고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은 서로에 대해, 서로의 호감에 대해, 서로 같이 보낼 시간에 대해 무한 긍정을 보내는 일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