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글에 이름을 붙여 그가 온 곳을 알리는 일
[※ 저마다 다른 빛을 품은 글들이 제 이름을 가지고 세상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2025 국민이 함께하는 저작권 글 공모전에 띄웁니다.]
광장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던 그 밤, 인파 한가운데서 친구에게 고맙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친구는 마음은 굴뚝같아도 아이를 돌보느라 광장에 함께하지 못했는데, 응원봉으로 열심히 빛을 더하고 있는 내 SNS 속 게시물을 보고는 미안하고 고마운 맘이 동시에 들었다고 했다.
“넌 다음 광장을 지킬 아이를 키우고 있잖아. 난 지금 두 사람 몫을 하고 있는 거지.”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마음을 알아보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가진 빛으로 함께한 그날을 기념했다.
그날의 대화 때문일까. 이후로 글을 쓸 때마다 ‘글이 내 자식 같다’라는 비유가 자꾸 내 안에서 공명했다. 내가 먹은 것, 들은 것, 생각하고 느낀 것들은 마치 자식에게 그런 것처럼 고스란히 글에 담겨 유전자처럼 세대를 넘어 전해진다. 한 문장을 쓰고, 그다음 문장을 이어내는 과정에는 내가 걸어온 선택의 결이 스며든다. 이처럼 글에는 자연스레 내 삶의 흔적이 지문처럼 남겨진다. 글을 쓰며 나를 숨기기는 어렵다. 감추려 하면 감춘 마음대로, 과장하려 하면 과장한 마음대로, 슬며시 그런 흔적이 비쳐 나와 결국은 내가 글에 배어나고 만다.
그렇게 나를 닮은 글에, 사람들은 ‘저작권’이라는 이름을 붙여 자신을 보호하려 한다. 나는 저작권이라는 말을 들으면, 글에 대한 ‘소유’권처럼 느껴져 어쩐지 머쓱해지곤 했다. 내 안에서 떠오른 생각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적은 것인데, 그것을 ‘내 것’이라 주장하는 일이 조심스럽게 느껴졌다. 마치 초대한 손님 앞에서 “이 음식 내가 만들었어!” 하고 굳이 목소리를 높이는 듯한 기분이랄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저작권은 유전자처럼, 지문처럼 글에 스며든 글쓴이의 삶을 알아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나름 닮고 나를 담은 그 자식 같은 글에, 나의 성을 붙여 이름을 지어주는 일과도 같다.
작가들은 세상 속으로 떠나는 글을 걱정한다. 자신의 글이 왜곡되거나 오해를 사지는 않을지, 누군가의 말속에서 본래의 색을 잃지는 않을지, 혹은 수많은 이들의 손을 거치며 전혀 다른 이름표를 달아 길을 잃지는 않을지. 집을 나서는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눈길처럼, 글쓴이는 세상에 던져진 글을 그렇게 바라본다.
이러한 노파심을 위안하기 위해 우리는 ‘저작권’이라는 이름으로 글쓴이와 글에 작은 실을 이어둔다. 누군가 자신의 글을 의도와 다르게 활용하거나, 때로는 그 글로 타인의 삶을 가장하려 할 때도, 그 실이 조용히, 글을 처음 써 내려간 그 손길을 가리키도록.
사람들의 수많은 소망이 형형색색의 응원봉에 담겨 광장을 가득 채운다. 각자의 마음이 고유한 색으로 빛나지만, 그 빛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하나의 거대한 물결이 되어 광장을 물들인다. 이처럼 다양한 빛깔의 응원봉이 하나의 광장에서 만나듯, 수많은 글도 세상의 광장에서 서로를 비춘다. 그 만남은 단지 텍스트의 교차가 아니라, 그 글 안에서 색색이 빛나는 저마다의 삶이 겹쳐지는 일이다. 글 속에 담긴 고유한 빛이 바래지 않도록, 저작권은 그 글에 이름과 소속을 새겨, 글 너머에 담긴 작가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