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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의 그 날, 함께한 첫 산책

해외 이태원 유가족들과 함께한 세번째 10월 29일

by Helen J

(참사와 관련된 장면이 글에 등장합니다. 오늘의 여러분 마음 상태를 먼저 살펴주세요.

읽는 것이 어렵다면 지금은 멈추셔도 됩니다.)




나는 계절마다 바뀌는 행사들을 좋아한다.


우당탕 유학생활에 낭만 중에 하나는 철마다 돌아오는 연례행사들을 챙기는 것이었다.

이스트때 좋아하지도 않는 밀크초콜릿으로 된 달걀모양 초컬릿을 괜시리 사보기도 하고, 가을엔 단풍모양쿠키가 단골 간식이었다. 할로윈때는 사탕을 잔뜩 사놓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기다리기도 했다.(이건 준비를 안해놓았다가 내 문을 똑똑했다가 실망한 아이들을 보았었기때문에 일종의 사명같은거다). 할로윈이 끝나면 바로 트리를 꾸미고, 새해엔 다이어리 1등으로 사는. 나는 스스로 공인하는 계절별 행사러버다. 요즘도 철마다 생활용품 칸을 지나며, 가끔 재철 인테리어소품을 보면 마음이 설렌다.


그런데, 3년전부터 내 일상에서 지워진 행사가 있다.

일상에선 입지 않을 듯한 옷을 입고 사람구경에 더 신났었던 할로윈. 특히 몇년 전 세일럼에가서 할로윈 코스툼을 입은 인파에 섞여 걸었던 그 기억이 너무나도 예쁜날로 기억에 남아있어 나에겐 소소한 기억으로 있는 그 날은 이제 내 다이어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3년전 이태원, 그때 생과 사로 갈라졌던 그 인파 속 무정부 상태와 비극이 진하게 그 날에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그날의 기억은 이렇다.

아무것도 모르고 골아떨어진 밤, 잠깐 새벽에 깨어보니 인터넷에 난리가 난거다. '아니, 멀쩡히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누구보다 안전한 우리나라의 밤거리에서 이런일이 일어날수가 있나?' 혹시나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인들이 있는지 연락하고 밤새 인터넷 뉴스를 새로고침했다. 그때 한 대학 학생상담소에서 일하던 나는 혹여나 지인을 잃은, 혹은 이 사건으로 심리적 충격을 얻었을 학생들에게 관련된 학생들의 긴급 상담에 대한 신청공지를 올리고 몰아치는 상담신청에 그저 이 일에 대해 내가 할수 있는 대처를 했다. 이 참사와 관련된 한 사람의 몫을 한다고 생각하면서.

상담 현장에서 만난 그날의 기억들은 참혹했다.

그날 잠깐의 찰나로 동행인을 하늘나라로 보내야 했던, 학생들의 이야기는 한동안 나를 그날에 사건의 골목으로 다시 불러세웠다. 급작스레 사람이 몰려 숨도 잘 쉬지 못할정도로 꽉찬 인파속에서 “이쪽으로 오지 말고 공간이 생기게 위로 밀어달라”라는 뜻에 “밀어!”라느 구호를 사람들은 반대로 알아듣고 인파를 밀어 헤쳐나가려고 밀기도 했다고 했다. 한 학생은 구호에 맞춰 사람들을 밀었는데, 그때 자신이 더했던 체중과 밀치는 힘이 추후에 누군가의 삶을 끊는, 그 압박의 일부분이었다는 죄책감에 자신을 경멸하기도 했다.

길거리에 너무 많이 마치 빨래감처럼 현실감없이 널부러져있던 사람의 신체들의 이미지를 말하며 한 내담자는 말을 더 이어가지 못하고 짐승처럼 울었다. 나는 말로 그려지는 현장의 참혹함에 슬픔보다는 어떠한 감정도 감각도 느끼지 못하곤 했다. 마치 이 세계에서 유리된 상태가 되어 무감각한 내가 무기력하게 느껴지곤했다. 개인차는 있었지만 이 상담들은 길게 지속되지 못했다. 많은 학생들은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며 침묵을 택했다.




이날의 사건, 그리고 그 이후에 이 일에 대해 벌어진 일들.

내겐 모든 것이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매년 기일마다 열리던 추모행사의 내 기대보다 작은 규모, 그리고 아직도 유가족들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 추모주기 행사의 참여자로 나는 아직도 마치 내가 그날의 거대한 인파에 휩쓸린것 같은, 어떤 무언의 힘에 맡겨져 나 하나로는 아무것도 대응할수 없을 것만 같은, 해소되지 않은 압박감을 느끼며 답답해 하곤 했다.

올해 참사 3주년 주기를 맞이하여 최초로, 사실 당연히 마땅히 벌써 이루어 졌어야 할, 참사 피해자 해외 유가족 초청이 정부 주도로 이뤄졌다. 이 분들을 위해 통역봉사자를 구한다고 해서 그분들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통역봉사를 신청하였다. 이 오랜 짓눌린 압박감을 벗어나 나도 무언가를 해 보고싶었다.

내게 주어진 역할은 한 대학 유학생 유가족분들을 고인의 모교를 돌아볼수있게 돕는 일이었다. 동선을 효율적으로 짜기위해 유가족분들게 학교에 어디를 보고싶으신지 묻자, 지도교수를 만나보고 싶고, 또 고인이 걸었을 거리들을 걸어보고싶다고 하셨다. 고인은 졸업후에도 한국에서 살고싶어했는데, 한국이란 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캠퍼스를 걸으며 그런 마음을 가졌는지 걸으며 가늠해 보고싶다고 하셨다.


사정이 있었을 것이라 믿고싶지만, 학생의 지도교수를 찾고, 혹여나 학교 방문시 동행해 캠퍼스를 소개해 줄 수 있는 재학생이 있는지 문의하자 학교 부서는 이리로, 또 저리로 전화를 돌리며 회피했다. 지도교수는 개인정보라 확인해 줄수없다며 학생에게 물어보라는 부서도 있었다. (희생자가 된 학생에게 지도교수명을 직접 물으라니. 정신이 있는 학교인가?)


하지만 이런 사람들에 실망한 것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연대와 따뜻함을 느꼈다. 내가 찾고있는 도움을 사람들에게 알리자, 그 대학 학생들 중 학교투어를 돕고 싶다는 재학생들이 연락이 왔다. 그날 시간이 되지 않는 학생들은 어디를 방문하면 좋은지 루트를 짜주기도 했다. 한 학생은 고인이 들었을 필수 과목 수업 리스트와 그 수업이 이전 해에 어디서 이루어졌는지 확인하여 가족들이 가 보면 좋을, 고인이 수업을 들었을 것으로 보이는 강의실 리스트를 뽑아주기도 했다. 연락이 닿은 지도교수님은 학생이 완성하지 못한, 논문의 첫장을 프린트해 유가족분들에게 설명해 주시기도 하고, 학생과 관련한 기억을 나누어주셨다. 동행한 재학생들은 유족들이 소개하는 고인의 모습들을 같이 듣고, 고인이 걸었을 공간을 같이 걸었다.


하늘이 도운것인지, 혹은 하늘에서 고인이 돕고있는지 며칠간 추웠던 캠퍼스가 유독 그날은 걷기에 알맞은 따스함이 있었다. 유족분들은 처음 캠퍼스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는 무거운 공기가 맴돌았지만, 조금씩 동행하는 재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보이시기도 했다. 고인과 관련된 시를 우리에게 읽어주기도 하고, 몇 번이나 이 여행이 어떤 의미셨는지 나눠주셨다. 공간을 소개하는 일 보다, 이 일 이후에 우리가 함께 추억하고 동행하고 있다는 것, 모두에게도 아픔으로 같이 보듬고 있다는 것, 이것을 함께 느낀 소중한 시간이었다.


내년에도 정부초청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이번엔 못온 가족원도 그때 또 뵙자며 우리는 몇 번이나 인사하고 메시지를 나누었다. 그날의 따뜻한 햇볕이, 그리고 함께 손잡은 온기가 3년전, 무력감에 압도당했던 나에게도 비춰져 내 마음 한 공간도 훈훈히 데워진 느낌이 들었다. 굳이 유창한 언어로 통역하지 않아도, 같이 눈을 마주보고 손을 잡고 서로의 눈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그날의 소통. 그 볕의 기운으로 모두가 한걸음씩 보듬으며 나아갈수 있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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