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D 담당자들을 대상으로 교육과정개발에 대해 강의를 하면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 하나가 이 질문이다.
처음 이 질문을 받았을 때 바로 답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시원한 답을 주지 못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어려운 것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도 이 질문은 HRD 부서의 존재이유에 그 뿌리가 닿아 있는 질문이다. HRD부서의 존재 이유를 흔히 "CEO의 전략적 파트너"라고 하지만, 같은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더라도 일상업무에서의 의사결정 기준은 조직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현장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것이 곧 Top의 니즈를 충족시키는 것과 동일한 조직이 있는 반면, Top의 니즈에 따라 충실히 일을 추진함으로써 현장을 혁신시켜 나가는 것이 중요한 조직도 있다. 가고자 하는 방향이 같더라도 가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그러니 HRD가 Top의 니즈를 따르는 것이 맞느냐, 현장의 니즈를 따르는 것이 맞느냐라고 묻는 수강생한테는 시원한 답을 주기가 쉽지 않다.
두 번째로 이 질문은 "HRD의 기술적 측면"이 아니라 "일을 잘하는 기술"과 관련되어 있다. 일을 잘하는 방법 또한 부서의 각 조직마다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다르다. HRD 직무에서만 놓고 보아도. 기획이나 분석을 잘하는 것을 인정해 주는 조직이 있는 반면 개발과 실행을 우선시하는 조직도 있다. 강의를 잘해야 인정받는 조직도 있고, 보고서를 잘 써야 HRD를 잘한다고 대우해주는 조직도 있다. 정답이 없다.
결론적으로 이 질문은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내용으로 HRD를 가르치는 사외 강사에게 물을 질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소속 조직의 일 잘하는 선배에게 물어보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낙 많이 접하게 되는 실무자들의 질문이라 나 또한 본의 아니게 머릿속에 이 저장해 두고 수시로 꺼내서 되새김질하게 된다.
"HRD는 CEO의 전략적 파트너이다"라는 말은 HRD 부서 내에 전설처럼 떠도는 말이다. 필자가 참석했던 1994년 ATD(Association for Talent Development)에서도 이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는 그저 멋진 말이라고만 생각했었다. 이후 HRD 직무를 꽤 오래 수행하면서는 이 말의 진짜 의미는 HRD부서가 CEO의 전략적 파트너가 "제발 되고 싶다"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HRD는 CEO를 향해 애절한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제는 솔직히 인정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HRD는 CEO의 전략적 파트너가 아님"을 인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HRD는 CEO를 짝사랑할 수밖에 없는 속성을 가졌음"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간혹 HRD가 곧 경영이라고 하면서 HRD의 짝사랑에 따뜻한 화답을 보내주는 CEO도 계시지만, 정말 보기 드문 경우이다. 누가 뭐래도 HRD는 스탭조직이다. 그리고 스탭의 1차 고객은 CEO이다. HRD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CEO를 향한 짝사랑이 가끔 지치고 힘들 수도 있겠지만 방향 자체는 합당하고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답이 쉬운 것이라면 왜 HRD 담당자들은 TOP과 현장 사이에서 갈등하는가?
여기에서 문득 예전에 모그룹 지주회사의 부회장의 말씀이 기억난다. "좋은 관리는 임직원들이 서비스받는다고 느끼는 관리이다." 지주회사의 역할에 대해 말씀하시던 중에 하신 말씀이셨다. 이 말씀은 CEO와 현장 사이에서 고민하는 실무자들의 고민을 즉각 해결해 줄 수 있는 답은 아닐 수도 있다. 기술이나 기법이 아니라 관점과 기준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 일을 잘하는 사람들은 기술로만 일하지 않는다. 한 단계 높은 차원에서 상황을 관조하고 시야를 넓혀 남들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는 사람이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을 우리는 "내공"이라고 부른다.
내공이 있는 HRD 담당자는 일을 할 때 CEO의 올바른 의사결정을 돕는다. 그렇다고 해서 현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CEO의 의사결정을 돕기 위해서는 현장의 니즈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HRD는 CEO와 현장의 중간자적 입장에서 Linking Pin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그 방법이 조직마다의 맥락과 상황에 따라 다 다를 뿐이다. 예를 들어 CEO의 성향이 현장의 의견을 중시한다면 최대한 현장의 의견을 모아서 CEO를 납득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CEO에게 제시해야 한다. 반면 자기주장이 강한 CEO라면 CEO의 방향성을 효과적으로 현장에 설득하는 역할을 HRD가 해야 한다.
여기에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점은 중간자적 역할을 한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는 HRD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HRD 담당자는 CEO와 현장의 니즈에 대한 자신만의 1차적 판단을 내려야 한다. 여러 가지 상황이 결정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CEO의 니즈와 현장의 니즈 중 어느 쪽이 더 합당한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CEO의 성향이나 현장 상황을 고려하기 앞서 그 판단을 기초로 CEO를 설득시킬 것인가 혹은 현장을 설득시킬 것인가의 큰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직급이나 경력이 낮은 HRD 담당자일수록 상대적으로 CEO보다는 현장을 더 가깝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평소 얼굴 보기 어려운 CEO보다는 자신들의 입사동기와 선후배가 있는 현장의 이야기에 더 귀가 열리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를 경계해야 한다. HRD 부서의 선임들은 후배들의 이런 성향을 고려하여 HRD는 스탭 조직이고 CEO의 의사결정을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지속적으로 알려주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